“주권은 하나님의 전 존재를 특징짓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모든 속성에 있어서 주권자시다.”
_ A. W. Pink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110:3)
1/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1-3)
2/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구속(4)
3/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5-7)
만약 우리가 1세기에 살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면, 설교 본문이 시편 110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편이 23편이라면 박해받던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시편이 이 시편이다.
시편 23편은 한 인생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실한 고백과 감격으로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해 시편 110편은 철저하게 공동체적이고 동시에 역사적이며 우주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한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서 오며 그 승리를 함께 누리는 것이고 그 승리에 참여하는 성도의 승리의 소망이 담겨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성경이 없었다.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이 그들의 성경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바울의 첫 편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무렵인 25년 정도,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그분을 알았던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게 전부였다. 2세기가 되어서야 교회는 지금 우리가 기지고 있는 형태의 사복음서를 갖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믿는 사람이었다. 메시아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지도자, 곧 왕과 제사장으로 따로 기름 부어 세운 지도자를 두었다. 그러나 ‘왕’은 독재자와 그의 군대와 연결시키고, ‘제사장’은 거대한 성전과 비인격적 종교생활을 통제하는 남자들과 연결시킨 가까운 이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왕’이라는 단어와 ‘제사장’이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철저히 오염되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그들이 경험한 ‘왕’은 독재자를 의미하고, ‘제사장’은 하나님보다 돈을 훨씬 사랑하고,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성전을 사업의 장소로 이용하던 사람들이었다., 열심당이 로마의 폭력과 세금 징수에 대항했다면, 성전 제사장들의 타락과 신성모독에 대항한 그룹도 있었다. 이러한 제사장 제도와 선을 그은 유대인들을 에세네파라 불렀다. 그들은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과 엄격한 훈련과 절제된 도덕성을 갖춘 공동체였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였다. 예수님은 전형적 메시아의 모델과 완전히 달랐다. 군대도 없고, 칼도 없고, 천사들의 개입도 없이 십자가에 사형되신다. 메시아 예수는 왕처럼 보이지 않는 왕이었다. 로마 황제와 로마의 법 제도를 대변하는 빌라도 총독은 판결을 내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군중의 손에 예수님을 맡겨 분명한 죄목없이 예수님을 죽게했다.
예수님은 제사장처럼 보이지 않는 제사장이었다. “머릴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재판을 받는데, 가야바는 화려한 궁에서 살면서 부자와 권력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왕궁도 군대도 없는 왕, 성전도 전례도 없는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의 충격은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힘든 일었다.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지켜본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데, 이제 살아서 그들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40일간 예수님은 머물면서 그들과 이야기 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만져보기도 하고 함께 먹기도 하였다. 이 불가능한 사건을 소화하는 데 40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일주일 전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적대적인 심문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편 110편을 언급하시면서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서 물었고, 그것으로 그 들의 심문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예수님은 시편 110편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신 것이다.
시편 110편은 15번 인용이 되거나 암시가 되는데, 8번은 직접 인용이고 7번은 암시이다. 마르틴 루터에게 시편 110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주요 시편”이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경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견을 생각하고 토론하고 묵상하고 암송했지만, 그중에서도 시편 110편을 가장 가까이 했다.
오늘 시편은, 주께서 오셔서 거짓되고 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쁨으로 주님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믿음과 싸움 후 맑은 시냇물로 목을 축이는 승리의 갈구가 담겨있다. 박해와 죽음의 위협이 육신의 생명보다 가까이 있는 현실에서 쉼 없이 드려질 기도요 소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분의 나라, 그분의 통치, 그분의 승리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 기도처럼 “나라가 임하소서”하는 기도만큼 중하며 화급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공동체적 종교이며 기도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이다. 오경웅은 이 시편을 군자도장(君子道長)이라 하였다. 주님의 길 영원하리라라고 말할 수 있고 참된 신앙인의 길 영원하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을 뜻하든 간에 그 바탕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며 참된 인생은 그분의 길 위에 서 있다는 고백이다.
이 시는 시편 중에서도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시이다. 그러나 이 시처럼 신약성서에 많이 인용된 시도 없다. 1절과 4절은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시로 인용하였다. “다윗과 같은 임금이라 주라고 부르신 분은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 신약성서 기자들이 이 시의 첫 절을 인용한 이유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메시아라 함을 유대인 자신들이 반대를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잘아는 이 고대시 한 편의 구절로써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입증했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시인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영력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 계획을 한 임금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 왕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맡은 군주로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셨다. 그러므로 시온이 그의 왕국의 중심지요, 여기서 행하는 그의 정치는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킨다. 이 나라의 주권을 및략하는 모든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용감한 청년들이 속속 일어나서, 비록 아침 이슬처럼 사자지지만 새 아침을 빛나고 신선케 하는 역할을 이 청년들이 감당한다.
그 임금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기도 하다. 아론의 혈통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계통을 따라 된 제사장이다. 이는 옛날 멜기세덱의 제사장 반열을 따르고 있다. 이 나라를 대항하는 적들이 일어나 전쟁을 시작해 와도 모든 왕들을 쳐부수고 시원한 물을 마시듯 깨끗한 승리를 한다. 이 왕이 누구인가? 역사에 나타난 어떤 임금인가? 미래에 나타날 메시야 왕인가? 시편 2편과 72편과 같이 메시아 시로 불리는 시의 하나이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 말한 히브리서 기자의 사상(히 5:15, 7:17,21)은 이 시의 4절에 의하여 확신한 소신을 보여준다.
3절의 “새벽을 적시는 이슬처럼”이란 구절의 원문은 참으로 어려운 문장이다. “새벽의 품 속에서”라고 함이 원문 그대로 직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슬은 새벽 일찍부터 온 땅을 적신다. 새벽은 온통 이슬로 인해 습기에 젖어있다. 그래서 팔레스틴 지방의 대낮의 햇빛이 아무리 불볕이라 해도 모든 식물들은 새벽에 흠뻑 내린 이슬의 습기로 인하여 그 생명이 커가고 그 열매가 여물어간다. 한 나라의 젊은이는 역사의 아침을 적시는 새벽 이슬이다. 새벽 이슬 같은 젊은이가 모여드는 주권자는 행복하다. 아침 이슬과 같이 빛나고 신선한 젊은이가 차고 넘친 교회는 복 받은 교회이다.
시편 기자는 메시아를 만난 사람들의 인생을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이라고 그린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난 그 순간 우리는 새 비전을 잉태한 채 새 목표를 향해 헌신하는 이생이 된 것이다. 그에게는 온전히 새로운 미래가 펼쳐져 있다. 이 가능성의 미래를 향해 펄떡이는 가슴으로 일어서는 자들을 가르쳐 성경은 주의 백성이라고 일컫는다. 메시아를 만난 사람은 변할 수 밖에 없다. 주께서 이제 거룩한 권능의 홀을 손에 잡으시고 우리를 일으키시며 함께 새 시대를 다스리라자고 하신다. 그리고 제사장 되신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며 일어나 이 시대를 함께 치유하자고 하신다. 새벽이 밝아온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볼 수 있도록 어둔 눈을 열어 주십시오. 회심하지 않은 귀를 여서서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의 좋은 소식을 듣게 해 주십시오. 죄로 인해 오랫동안 닫혀졌던 마음을 여써서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믿음으로 당신이 영광받기를 원합니다. 죄인들이 당신이 권능을 베푸실 때 자발적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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