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인의 불평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의 행동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기적적인 회복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양식/구조/배경
A. 여주인의 불평
a. 병이 그녀의 아이의 호흡을 앗아감 17b
b. 그녀가 엘리야의 권능에 대해 잘못된 관계를 묘사함 18
c. 엘리야가 도전에 직면함 19a
B. 선지자의 행동
a. 그 자신의 침대로 옮김 19b
b. 상징적인 행동 21a
c. 기도 21b
C. 기적적인 회복
a. 소년이 울다 23a
b. 엘리야가 그를 어머니에게 주다 23b
D. 해석적 결론 : 그녀의 증언 24
A. 여주인의 불평
‘이 일후에’라는 단어로 본문은 시작된다. 과부는 엘리야에게서 풍기는 비범한 인격을 믿고서 한 떡을 만들어 주었고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엘리야의 시중을 들었으나, 자기아들이 죽자, 자기가 하나님께 징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렙다 과부의 가정에 분명 어떤 남자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아픈 아이는 단순히 ‘그 집 주인되는 여인의 아들’로서만 언급되고 있다.
그 사이 우리는 엘리야가 과부 집에 들어가 옥상 방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임무를 행하고, ‘그곳에 머문다.’ 엘리야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혹시 하나님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캐물었을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후문맥인 18장 1절을 보면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하신다. 그 주님의 음성이 있을때까지 엘리야는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는 일이 벌어진다.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 기적으로 이제야 겨우 새로운 삶을 향한 기회를 얻은 아들이 병으로 죽는다. 남편을 잃은 이 여자는 이제 아들을 잃는다. 어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바로 자식이 죽는 걸 보는 일이다.
여인의 원망이 엘리야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여인은 엘리야가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을 약속했고, 그 예언이 이루어졌으며 자신과 아들의 생명이 선지자 덕분에 유지되었음을 잊어 버린다.
이 미심쩍은 예언자는 신비로운 면이 있고, 하나님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의 기적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또 설명하기 힘든 아들의 죽음이 일어났을 때, 이 예언자 말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든 게 매우 인간적이다. ‘호산나’는 한순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로 바뀔수 있다. 한순간 환호하고 기뻐하다 다음 순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누군가 좋은 일을 베풀면 고마워하다가 나쁜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며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좋은 일을 설명할 수 없듯 나쁜 일 또한 마찬가지여서 어차피 좀 다르고 낯선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운다.
이야기는 서둘러 진행된다. 그 여인인 엘리야에게 격한 감정을 토로한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 사건이 무슨 죄들이며, 어떻게 아픔이 그 죄들을 기억나게 했단 말인가? 그녀의 죄들은 그녀 자신의 비밀 속에 남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신적인 심판에 의한 아들의 위기-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어 끊어진 것-에 대한 것에 엘리야는 반박하는 행동을 해야 했다.
과부는 아들의 죽음이 자기의 죄와 관계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선지자가 머무는 곳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의 드러나지 않은 죄를 기억해내며 두려워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한 사람의 죄와 생명에 대한 재앙사이에 인과성을 설정하지 않으신다. 신약적인 용어를 빌리자만, 이 소년의 중병은 오히려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요 9:3) 하심이다. 이 여인의 외침은 단순한 절망의 외침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임을 모르기에 선지자에게 어떤 부탁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2. 엘리야는 정신이 없는 이 여인과 논쟁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고만 한다.
모든 게 매우 인간적이다. ‘호산나’는 한순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로 바뀔 수 있다. 한순간 환호하고 기뻐하다 다음 순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누군가 좋은 일을 베풀면 고마워하다가 나쁜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며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좋은 일을 설명할 수 없듯 나쁜 일 또한 마찬가지여서 어차피 좀 다르고 낯선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운다.
엘리야는 자신을 방어하거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부드럽게 청한다.
‘아들을 이리 주시오!’
과부에게 남은 건 아들 몸뚱이가 전부인데, 그런 아들을 과부가 주어야 할까? 그것도 이 일의 원인 제공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이다.
죽은 아들이 어머니 무릎에 놓였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죽었다. 그런데도 엘리야가 아들의 몸을 가져가도록 허락한다. 왜일까? 자포자기? 아니면 다시 한번 기적을 바라는 희망의 몸짓? 여자는 내맡긴다. 신뢰한다. 의탁한다. 자신의 품안에서 죽은 아들의 그 몸뚱이를 엘리야에게 건넨다.
B. 선지자의 행동
의식이 없는 아이를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었다.’
20절에는 기도를 드린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다’
조촐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진 일, 아들의 죽음, 아들을 안고 자기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힌 엘리야, 넋이 나간 채 아래층에 남아있는 여자. 엘리야도 하나님께 묻는다.
엘리야는 자신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등을 돌린다는 뜻이 아니다. 엘리야는 여전히 하나님과 관계안에 있다. 하나님께 묻고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된다.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 그냥 하나님께 소리 질러도 된다. 하나님은 받아주신다.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화, 분노, 슬픔, 항의를 표출하고 입 밖에 내고, 누군가에게 던져놓음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누군가가 이를 받아주고 이해해 주리라 확신할 수 있어 이를 던져놓을 수 있다.
엘리야도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하고, 사실 대답을 얻지도 못한다. 그렇다 해도 엘리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행동할 힘을 얻는다.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를 쏟아낸 후 행동에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21절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누군가의 몸 위로 눕는 행위는 살아있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힘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준다는 의미이다. 이제 엘리야는 능동적이 되었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저항을 쏟아낸 엘리야, 부루퉁해서 구석에 앉아 하나님이 어찌 나오실지 기다리던 엘리야. 하지만 이제 행동한다. 그리고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간구한다. 비난과 저항에서 행위와 간청으로 바뀌어진다. 그때, 하나님의 자신의 권능을 베푸신다.
엘리야는 능력 있는 기도의 사람이다. 여호와의 그의 요청대로 응답하신다.
22절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C. 기적적인 회복
아이는 살아났고,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그제서야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한다.
24절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
우리의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욥의 고백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된다.
‘주여 네가 귀로만 들어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욥기 42:5)
우리의 막연했던 믿음, 주님의 대한 그림자 같은 믿음이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지난 위기를 생각해 보라. 또 그 가운데서 구원하신 은혜를 기억해보라.
또한, 우리 삶의 현재의 고민을 생각해 보라. 그 가운데 행하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기적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편 103 편
[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사르밧, 오늘날의 ‘사라판드’로서, 시돈에서 남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곳 이방의 사람이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말씀의 진실함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26절에서 이 사건을 근거로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눅 4:24-26)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우리는 이 말씀을 신약시대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누가복음 7장 11-17절의 말씀이다.
눅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의 무리와 나인성 마을의 무리가 부딪히는 사건이 나온다.
무리의 구성원 | 행선지 | 목적, 분위기 |
예수님, 제자들, 무리 | 나인성 |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증거로 활기참 |
과부, 죽은청년, 멘자, 그성의 많은 사람 | 장지 | 장사하러감, 울고 있음 |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주목하시며 어떤 행동을 하시는가?
주님은 과부를 보셨다. 독자가 죽음으로 슬픔 가운데 있다. 경제적으로는 설 땅이 없고, 심리적으로도 소망이나 기대가 없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신다. ‘상여꾼’에게는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신다. ‘죽은 청년’에게는 외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민 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또,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으로 덮어 두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역사가 요세푸스).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깨시고 관에 손을 대신다.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사랑이 율법의 문자를 이해를 뛰어 넘어신 것을 보여주신다.
죽었던 청년은 어떻게 되었나? 죽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고, 입을 열어 말도 하며, 과부인 어머니에게 만져졌다. 엘리야가 하였던 일이 바로 이 일이다.
하지만, 주님과 엘리야는 다르다. 엘리야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몸을 3번 펴서 엎드렸다’ 그결과로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심으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명하신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진주주약교회 주일예배
김광영 목사
예수님은 우리 삶의 해결되지 않는 곪아터진 아픔을 해결할 참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겠는가? 눅 7장 16절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우리 예수님은 누구신가? 함께 찬송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자.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