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말씀

7th 약속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누가복음 7장40~50절

주님의 약속 2018. 10. 19. 22:56











누가복음 740~50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314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Bible

 

1.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40-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무엇에 대한 대답인가?

앞의 내용을 보면,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 시몬의 마음에 말에 대한 대답이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주님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바리새인인 시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는 예수님을 식사의 자리로 초대했다.

그런데 불청객의 방문이 있었다. 바로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향유담은 옥합을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 뒤에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다.

정말 엽기적인 그녀이다. 여자가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머리를 풀고 입에 입맞추고 비싼 향유까지 깨뜨리는가?

더 나아가, 이러한 상황을 제지하지 않고 그냥 두시는 예수님이 더 불만스러웠다.

이 사람이 선지자 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줄 알았으리라.”

이때, 주님이 시몬에게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시는 것이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500데나리온, 하나는 50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것이 없어, 다 탕감해 주었는데,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노동자의 하루 품삯. 인력시장 새벽에 나가 불려가면, 8만원을 받는데, 그 중에 1/10은 인력소개소에 삯을 제한다. 그렇게 72천원.

그렇게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당시 1데나리온 은전이었다.

500일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돈이 500데나리온이다. 1년에 52주를 쉬고 약 300일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 그렇다면 약 2년치의 노동자의 삯이다.

또 다른 사람은 50데나리온이다. 2달간 일해서 벌어 갚을 수 있는 돈이다.

2년과 2. 그 노동의 삯으로 값아야 하는 빚. 그것에 대한 빚진 자의 긍휼함이 탕감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의 대답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2. 이 여자를 보느냐 (44-47)


이 여자의 행동과 시몬의 행동에 대한 비교를 해 주신다.

 

1)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먼지 나는 땅, 샌달에 뿌옇게 앉은 먼지를 씻게 발씻을 물을 내주는 것은 초청한 주인의 기본적인 예의였다. 하지만, 시몬은 그런 수고도 하지 않았다. 발을 씻기기는 커녕 발씻을 물조차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지시고 그 머리털로 씻어 내리고 있다.

 

2)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유대인의 관습은, 입맞춤으로 상대에 대한 호의를 표시한다. 우리 같으면 악수나 목례라고도 할 수 있다. 최소한의 인사법이다. 그런 호의조차 시몬은 하지않았다. 쉽게 말해 쌩깠다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입도 아닌 발에 그 입을 계속 맞추는 여인의 모습.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생명의 은인에게 표현하는 모습이다.

 

3)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스라엘에 흔하디 흔한 게 감람유다. 올리브기름이다. 발에차이는게 이 기름이다. 다량으로 생산되고 서민적이며 누구나 사용하는 기름이다.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햇살에 먼지많은 거리에서 상하기 쉬운 모발. 집까지 모셔온 손님에게 기름을 머릿결에 부어드리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는 내 발에 향유를 부었느니라.

향유..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구하기 어려운 기름이다. 더구나 이 향유는 옥합에 담겨있었다. 이 옥합은 설화석고로 만든 것인데, 이 지료로 만든 그릇은 당시에 최상품이었다. 이 옥합에 최상의 향유를 주로 넣었다. 아마 이 여인의 재산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부어드리기에도 전혀 아까움이 없었다.

당시 향유 옥합은 굉장히 값비싼 향유이어서 약 300데나리온 정도의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인가? 47절을 읽어보자.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나도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줄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많은 죄에 대한 사함이 이 여인을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오직 예수님께 사랑과 헌신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바리새인 주인장 시몬은 그저 예수님을 자기집에 들인 것 만으로도 큰 사랑을 베풀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48-50)


죄는 주관적 죄책감인가? 쌍방 간의 관계 속에 일어난 사건인가?

주님은 죄를 빚이라는 법적관계에 발생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가 많은 사랑을 표현했기에 죄가 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사함을 받았기에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 큰 돌과 작은 돌... 기억하는 것?

 

여자에게 말씀하신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함께 앉아있는 자들, 아마 바리새인 시몬의 친구나 동료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을 선생님, 랍비... 잘해야 선지자 정도로 인식하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한 선포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전 문맥, 누가복음 521절 중풍병자를 네 친구가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언할 때도 이 같이 쑥덕거리고 있었다. “참람하도다. 저가 누구기에 감히 죄 사함을 선언한단 말인가?”

유대인들에게 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린 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포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실 때, 그 집에 앉으셨을 때. 그들은 빈정거렸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도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의 사랑의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행위구원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의 사랑은 주님으로 인해 죄사함을 선언받은 기쁨과 감격의 표현이었다.

 

Be live


존화이트의 <헌신의 댓가>에서 헌신이란, ‘무언가 늘 포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가장 최고의 것을 얻기 위해 덜 가치있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교회 속에서 우리의 가족과 직장 일상 속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적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떠한 죄인이었는지, 그 십자가의 구원이 어떤 능력인지 깨닫지 못하는 반증이 아닐까?

옥합을 깨뜨려 그 속의 향유로 예수님에 대한 감사, 사랑을 표현한 여인.

우리의 주님을 향한 감사와 예배는 어떠한가?

여인의 모습에 가까운가 바리새인의 모습에 가까운가?

 

3시절, 나는 주님앞에 섰다.

나의 행위나 열심 봉사와 수고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인간으로 섰다.

숨쉬기 조차 힘든 늑막염으로 응급실에 입원하여, 병원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웠을 때,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온 것인지. 무엇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할지 나즉히 기도했다.

당시 침례병원 뒤편 성모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뒤 큰 병원으로 옮겨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 다음날이 주일이라. 예배에 어렵게 참석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네

주님의 보좌 앞에 이른 천한 몸.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기도를 받았고, 입으로 고름덩어리가 오바이트 되었는데, 딱딱한 고름이 나오면서 더 이상 병원가지 않고도 건강히 고3시절을 보내며, 학교아래 부산진교회서 기도하며 가장 열심히 고3시절 철야기도까지 참여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하염없이 묵상하며 찬송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떡을 쪼개시며, 포도주 잔을 부으시며, 이것은 너를 위해 찢어주는 나의 몸, 나를 위하여 으깨어 흘린 나의 피라고 하셨다.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찔리시고 상하시며 그렇게 깨어지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잔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구약의 성전의 불을 밝히는 기름, 그 감람유의 올리브는 열매가 탱글탱글 살아있어서는 결코 드려지지 않는다. 껍질이 파쇄되고 열매가 짓이겨지며 완전히 녹아질 때 하나님의 성전을 밝히는 정결한 기름이 되어 하나님의 성소를 빛내게 되었다.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옥합같은 몸을 깨뜨린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사슬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생명수가 되셨다. 십자가 고통당하사 버림받고 외면당하셨네. 짓밟힌 장미꽃처럼 나를 위해 죽으셨네

 


바울사도도 디모데 후서에서 내가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했다. 그의 사명의 길이 제사의 마지막 단계처럼 깨어지고 부어지는 삶이었던 것이다.

전제(A drink offering)은 민수가 15:1-10 구약의 제사법으로 제물위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나 감람유를 부어드리는 제사의 의식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 비유하며 그 마지막단계에 와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게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모든 것을 부어드리는 삶을 살았다.

깨어진 향유옥합으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신 주님 곁에는 향기가 진동했을 것이다. 우리 삶의 깨어진 아픔과 상처도 주님 곁에 있다면 그분의 향기를 전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우리 삶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길 바라며, 십자가로 우리에게 새생명 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합시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