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 약속 '강하고 담대하라'_ 여호수아 1장 1~9절
강하고 담대하라
■ Opening
잔디깎기 맘
‘잔디 깎기 부모’라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최근, 미국 명문대 생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잔디 깎기 부모’의 양육방식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잔디 깎기 기계가 되어,
자녀가 걷게 될 길 위에 놓인 위험요소와 장애물을
말끔하게 제거합니다.
잔디 깎기 기계 부모를 둔 아이들은,
잡초와 돌멩이 하나 없는, 평평한 길을 걷게 되죠.
성공만이 존재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만약 잔디 깎기 기계로 제거하지 못한
역경과 마주치게 된다면
아이들은 역경을 스스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성공만을 경험하며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이
돌연 자살을 선택하는 배경으로,
‘잔디 깎기 부모’가 거론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잔디 깎기 부모’의
과도한 보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 반대편엔,
온갖 좌절을 혼자 헤쳐가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 부모의 이혼,
알코올 중독과 정신질환을 가진 부모.
처지는 조금씩 다르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201명의 아이들이 있었죠.
이 아이들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을까요?
자신 앞에 놓인 불행을 잘 헤쳐갈 수 있었을까요?
1955년,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선
833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833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30년이 넘는 연구가 시작되었죠.
카우아이섬 종단 연구로 불리는
대규모 심리학 실험이었습니다.
833명의 신생아 중,
201명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가정환경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연구진들은 이 고위험군에 속한 201명의 아이들 대부분이
사회부적응자로 성장할 거라는 가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201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의 뒷바라지도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더 도덕적이며,
성공적인 삶을 일구어냈죠.
온갖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잘 자란 72명의 아이들.
이 아이들은 무엇이 달랐을까요?
연구진은, 72명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아이들 주변에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존재였습니다.
잘 자란 아이들 주변에서 어김없이 발견된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믿어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지할 수 없는 부모 대신
조부모나 친척, 때로는 마을사람이나 성직자 선생님 등이
그 역할을 해 주었죠.
성공한 아이들 주변에서 발견된
그들의 그 숫자는 최소 한 명.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력의 핵심이었던 겁니다.
‘잔디 깎기 부모’가 잔디 깎기 기계를 놓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아이들의
회복력을 믿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
잘못된 사랑 아닐까요. 김이진 작가 ebsnews@ebs.co.kr / EBS NEWS
다 큰 자식의 주변을 멤돌며 간섭하는 ‘헬리콥터 맘’에 이어 앞장서서 자식의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잔디깎기 맘(lawn mower parents)’이 미국에서 사회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미국 최고 명문대학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급증하면서 비상이 걸렸다고 보도했다. 아이비리그 중 한 곳으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는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13개월 동안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비리그에 속한 코넬대에서도 2009∼2010년 사이 6명이 자살했다. 미국 15∼24세 사이 인구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비율은 2007년 10만명 당 9.6명에서 2013년 11.1명으로 늘었다.
더 심각한 것은 대학 상담센터 조사 결과 센터를 방문하는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불안과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NYT는 이 비율이 최근 2년 새 13% 포인트나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을 오랫동안 상담한 학내 상담사들은 ‘부모들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스탠퍼드대에서 1학년을 담당하는 줄리 리트콧-하임스 학장은 2002년 취임 이후 부모가 수업 등록을 도와주러 직접 오거나 교수 면담까지 신청하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다고 NYT에 말했다.
부모들이 다 큰 자식들의 일상에 간섭하면서 독립의 기회를 앗아가는 것은 물론 자녀에게 ‘외형적 성공’만을 강조해 극심한 경쟁 속에서 쉽게 열등감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학생들이 이런 부모를 창피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69692
■ kerigma
1.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❶ 모세는 어떤 사람?
모세의 죽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잠겼다. 그들이 어떤 경우라도 마지막 비빌언덕이자 자신들을 믿어주고 대신 기도해주던 모세가 죽었다. 문제는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이다. 모세를 잃어버린 백성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이스라엘은 이 가나안으로의 여정가운데, 홍해바다를 극적으로 건너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무려 40년간이나 광야 행진을 계속합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온 것도 모세였던 것이다.
❷ 모세가 죽은 시점
전문맥 신명기34장 7~8절
“모세가 죽을 때 나이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30일을 애곡하니라.”
지도자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지내며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가나안땅에 거의 다다르게 됩니다.
가나안땅이 어떠한 땅입니까? 팔레스타인이라고도 부르는 이 가나안땅은 지정학적으로 갈릴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요단강이 중심에 길게 이어져 있는 그야말로 비옥한 옥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 드디어 이 요단강의 서편에 도착했습니다. 이 요단강 서편의 땅은 모압과 암몬사람들이 차지한 땅이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들과 싸워 이기고 이 땅들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동안 모세의 지도력은 너무나 강력했고,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지난 40년간 모세 외에 다른 지도자는 생각도 안했는데, 이제 어디 가서 이런 지도자를 찾는가?”
“누가 우리를 인도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할 것인가?”등등... 심한 절망감에 빠진 반응들을 보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깊은 불안과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서로 수군거리며 “이러다가 우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여기 요단 서편에서 그냥 이렇게 사는 거 아냐?”하며 망연자실 넋을 잃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은 중요한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❸ 그들이 잊고 있었던 것
‘모세의 시대는 가지만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신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여기까지 인도한 지도자는 엄밀히 말해서 인간 모세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여정과 그 인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획하심이었습니다.
이 성경의 첫 장면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지도력을 여호수아에게 이양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장 먼저 하시는 말씀. “내 종 모세는 죽었으니”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누가 인도했나? 모세였나?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크게 통곡한다. 하나님이 죽으셨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모세의 죽음은 큰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단 한사람도 우리를 떠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화)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루터가 지쳐서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사흘을 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던 루터 앞에 루터의 아내였던 케이티가 상복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예, 죽었습니다.”
“누가 죽었단 말이오?”
“당신의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당신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이렇게 포기하고 누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2. 너는 일어나 가라
수1:1하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3가지 약속을 주신다.
첫째, 땅을 주겠다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라. 애통과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일어나라는 말을 성령의 음성으로 듣기를 바란다. 주저앉은 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요단강을 건너가라. 새로운 비전이 주어진다. 신앙의 잠에서 일어나고 요단강을 건너라.
여기 앉은 성도들이 일어나면 교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산다. 하지만 주저 앉으면 희망이 없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사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은 차기 지도자로 세움을 입었지만 여호수아에게는 초기의 모세만큼이나 마음이 약하고, 담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일개 모세의 시종이었던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인도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일에는 더더욱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찾아왔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자신이 이 일을 하기에 부적합한 자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이 없고, 자신도 없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네? 제가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이러한 점을 간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무턱대고 밀어 부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닥으로 밟는 땅. 그 영역, 창12장 이래로 아브라함에게 주고자 한 땅을 주신다.
사람들은 약속을 잊었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도 땅을 주셨다.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믿는다.
말씀이 생명이 되려면 붙들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의 발바닥으로 밟는 땅. 교회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 곳을 너희에게 주겠다.
우리를 들어 우리의 밟는 땅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완성되는 세계를 만들어 나가면 그 곳이 하나님의 땅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이 과업을 이루길 원하신다.
둘째, 여호수아를 강하게 하시겠다
수1:5-6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셋째, 동행의 약속,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인간의 탑은 아무리 높아도 모래성에 불과하다.
우리의 강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우리의 강함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의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된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나니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나에게 있지 않음이라. 우리는 질그릇처럼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우리 안에 있어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날마다 새롭게 하며 살 때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
악기 중에 가장 비싼 것 중 하나가 하프다. 우리가 볼 때 하프연주자는 유유하게 선을 뜯는 듯 보이지만, 치마를 둘러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발로 이리저리 부지런히 밟는다.
직분이 타이틀이 ‘영혼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리가 물에서 유유히 노니는 것 같지만, 물에 떠 있기 위해 물 밑을 보면 발을 계속 움직이고 있다. ‘집사’ ‘장로’ ‘권사’라는 타이틀이 신앙을 보장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말씀과 기도 가운데 있을 때 영성이 유지된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니. 가나안으로 보내실 뿐 아니라, 여호수아와 함께 하겠다.
시51편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옵소서” 범죄한 다윗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약속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마28장 마지막 문장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그 세미하신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가?
믿음의 반응이 여호수아에게 필요하다. 7-9절의 말씀이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먼저, 강하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먼저, 강하고 담대하라
다음으로, 율법을 다 지켜행하라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다면 강할 필요가 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사43:10, 시23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리로다.
“푸른초장 푸른초장 .... 헬기로 음침한 골짜기를 넘어가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두려워 않는 것이다.”
물 가운데 지나도 물이 우리를 엄몰치 못하고 불이 우리를 사르지도 못한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자. 세상의 어떠한 줄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백(back)으로 삼으라.
6,7,9절이 점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을 걸고 약속하시는 말씀 외에 무엇 더 필요한가?
지도자는 반대자들의 반대를 이길 수 있어야 하고, 전쟁에서 자기 사람들이 이길 수 있도록 지휘해야 하는데 여호수아는 그것을 제일 먼저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내게 그 일을 감당한 능력이 있단 말인가?”...
우리들도 종종 그런 변명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그런 생각을 어떻게 간파하셨는지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라는 너무나 확실하고도 분명한 조건의 약속들을 제시하시면서 이 사역에 담대히 헌신할 것을 격려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절실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며, 헌신하려고 할때 가장 크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일을 감당하기에 도무지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다는 자기인식입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죠” 아주 겸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전에도 그러셨지만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의 지혜와 능력, 자신감으로 이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둘째,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 Live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것을 무엇으로 아는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거처를 우리로 함께 하신다.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말이다.
말씀을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자. 신앙인의 승리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커 보이고, 세상이 작아 보인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있는가? Q.T를 잘하고 있는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힘의 원천으로 알고 있는가?
위대한 모세의 죽음으로 불확실성속에 침울 한 때,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사 당신의 일을 하신다. 우리의 짧은 세대에 벽돌 한 장 쌓는 것이다.
모세도 죽었고, 여호수아도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