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약교회 주일예배 설교 / 욥기 42장 주께서 주신 결말 _ 김광영목사
욥기 서두에서 사단은 말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그러나 이제 욥은 고통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그는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사탄과 내기에서 하나님이 이겼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이 이겼다.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임을 욥은 보여준다.
지금 욥은 하나님의 압도적 권위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고백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1/ 1-6절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얼마나 하나님 보기를 원했는가?
(욥 19:26-27)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그는 자기의 억울한 인생을 알아주고 보살펴 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이 알아주길 바랬다. 죽은 이후 백골이 진토가 된 이후에라도 넋으로라도 하나님을 보길 원했다. 그러나 이제 이승에서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과 생생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믿음의 최고 경지다. 이제 욥은 인간 편에 선 인간적인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편에 서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욥이 수난받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준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으로서 욥은 하나님을 본다.
왜 자신이 그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지 까닭을 발견치 못하여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을 줄 알게 된다. 운명을 수용하는 법을 알았다고나 할까. 고통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욥의 회개는 무엇인가? 친구들이 그토록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세상의 죄는 자기의 죄가 아니지만, 자신의 죄가 묻어있다. 자신이 알지못하는 자신의 죄가 세상의 죄 속에 녹아있다. 세상 돌아가는 구조악을 자신도 같이 돌리지 않는가. 그처럼 자신의 죄의 깊이를 생각할 때 욥은 할 말이 없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런 불행을 당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자신이 당한 불행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회개의 핵심은, 죄보다는 죄스러움 죄송함에 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을 가깝게 느낀다,. 하나님 은총앞에서 느끼는 죄스러움이다. 규범을 어긴 죄가 아니라, 멋지게 살지 못해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났던 것에 대한 회개이다.
2/ 7-9절
욥의 편을 들어주심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함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든다.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욥이 하나님에 대하여 옳게 말했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 편을 너무 들다가 사람을 놓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하나님도 사람 편에 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지 않았는가. 사람 곁으로 오신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 편에 서시는 하나님이다. 사람 쪽으로 기울어져 계시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람은 사람 편에 서도 된다. 하나님 편을 드느라고 사람을 놓치는 것은 사람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위험한 폭력성이 들어있다. 하나님도 사람이 하나님의 수단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을 향하여 저항하는 욥이 하나님을 떠받드는 친구들보다 더 옳게 말했다고 하는 하나님 아니신가?
욥이 친구들의 죄를 속죄하는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면 그의 기도를 들어주어 친구들을 하나님이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하나님에 대해 잘못 말한 친구들의 죄를 대속하는 것 같지만, 좀 더 큰 문제를 볼 수 있다.
의인의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속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욥의 고난은 의인으로 고난으로 부각된다. 욥은 엄청난 수난을 겪고 있지만, 세상의 죄를 속하는 엄청난 권한이 주어진다.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느냐 아니냐는 욥에게 달렸다.
누가 감히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욥도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비해 욥은 여전히 의인이다. 세상은 의인들 때문에 꾸려져 나간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수난이 많다. 세상의 악에 저항하느라고 수난을 받는 의인도 있고, 까닭없이 불행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의인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세상을 살린다. 세상의 냉혹한 대접 앞에서 자기를 지키기도 힘든 고난을 당한 의인들에게서 용서의 장이 열린다. 자기를 학대하거나 비웃던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속죄의 기도가 세상을 살린다. 무심한 세상을 살리는 것은, 수난 받는 의인의 마음속에서 피어난 용서의 기도다. 의인 욥의 깊은 불행은 깊은 용서를 잉태했다.고난의 신비여.(참조 양명수, 『욥이 말하다』, 분도출판사)
3/ 10-17절 곤경에서 돌이키시고 갑절로 축복하심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해피엔딩이다. 의인은 결국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 그런 희망이 없으면 누가 의롭게 살려가 하겠는가? 이승에서 인과응보의 보상이 없다면 누가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 하겠는가.
욥은 이제 단순한 의인이 아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확인 되었다. 까닭 없이 불행을 당한 자가 깊은 절망의 굴을 통과하여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무관하게, 세상스런 축복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섬기는 것이지, 그분이 내게 남다른 축복을 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욥은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 그런 욥에게 하난미의 축복이 주어졌다. 죽는 자가 사는 것이다. 버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욥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수용하고 거기서 까닭 없이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폭풍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연 생명체들처럼 그냥 사는 법을 배운다. 거기서 욥은 입을 다물고 고백과 찬양의 언어를 조용히 쏟아낸다.
그러나 욥은 이미 말을 많이 했다. 격렬하고 치열한 언어들, 억울한 자는 할 말이 많고,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욥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격렬한 언어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입을 다물고 회개하는 욥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그 둘은 신앙의 두 축이다. 그 두 축의 긴장은, 성경을 어떤 굳어 버린 하나의 해석에 파묻히지 않도록 한다.
시몬느 베이유의 말
“고통은 한 동안 신의 부재를 초래한다. 죽음보다 더한 부재, 캄캄한 감옥에서 불빛의 부재보다 더한 부재가 공포로 우리 영혼을 엄습한다. 이런 부재 속에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다. ... 텅빈 가운데서도 영혼은 계속해서 사랑하거나 적어도 사랑하기를 원해야 한다. 그것이 제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면 어느날 하나님은 영혼 안에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욥의 경우처럼 영혼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러 올 것이다. 영혼이 사랑하기를 멈춘다면, 그것은 이승에서조차 거의 지옥과 맞먹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 116:5-7)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거둠의 기도
2021년 11월 7일 주약교회 고별설교
사랑의 하나님, 참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마른 들판에 꽃을 피우는 일이고,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돛을 달고 바람을 기다리는 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침내 거친 들에서 꽃이 피게 하시고, 기다리는 사공에게 순풍을 풀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공허함이 아니라 오히려 넉넉한 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때가 언제인지 분별하며 살게 하옵소서. 무성했던 나뭇잎들을 떨구고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가야 할 때를 알아 가뿐하게 허공에 몸을 던지는 저 나뭇잎의 홀가분함을 배우게 하옵소서.
기쁨과 슬픔, 고난과 위로, 빛과 어둠이 갈마드는 인생길에서 비틀리는 우리는 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욥처럼 ‘힘들다’ 말하고 비감에 빠지는 우리를 봅니다. 주님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얼굴을 보이심처럼, 기도하는 성도들 기다리는 마음들에 당신을 보도록 얼굴빛을 비추옵소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 2:9).” 하셨나이다. 주님, 욥의 고난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그런 고백을 우리도 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 땅의 일들을 다 알지도 못합니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8:28)”
마지막까지 욥처럼,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신앙의 끈을 붙드는 주약교회 성도들 위에 주님 함께 하시고, 너무 지체하지마시고 속히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의 약속안에 살고, 주님의 약속 알게 해주는 그런 체험 있는 신앙 간증있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몸 버리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참조: 김기석의 기도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 신앙과 지성사)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