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 창 5장 21-24절
1/ 가인의 계보 vs 아담의 계보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이다.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것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렇게 이 계보에서 일곱 번째 사람은 ‘에녹’이다. 성경계보는 일곱 번째 위치에 독특하게 중요한 사람을 두었다. 에녹은 죽었다는 말이 사용되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다.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라고 한다. 이것은 이 장에서 장수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올 수 있는 가장 신성하고 명예로운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야렛이 낳은 아들 에녹이 5장의 주인공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으며,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이후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다. 그는 365세를 살았다. 그는 5장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
5장에서는 아담의 후손의 죽음이 반복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반복이다. 창세기 3장의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된다. “너희가 반드시 죽는다”, 사단은 반대로 말했다. “너희가 죽지 않으리라” 하지만, 사탄의 말이 거짓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모든 사람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창세기 3:22 의 선언 이후로 사람이 영원히 사는 일은 없어졌다. 인류는 저주받은 가운데 계속해서 번식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다. 초기 인류의 장수는 원래 아담이 가졌던 죽지 않는 속성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오래 살았던 므두셀라(969년)도 하나님께는 하루와 다름없는 1,000년을 넘기지 못했다(시 90:4)
하지만, 동시에 5장은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영생의 길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본문의 질문이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셋의 후손들의 족보는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손들의 족보와 대조되며 등장한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둘을 비교하면, 4장의 가인의 족보에는 그 후손들이 이룬 화려한 문명들 중심으로 열거된다. 아담의 족보는 오직 그들이 자식들을 낳고 살다가 죽은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4장에는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가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 5장은 모두 나이를 세 번씩 기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과 동행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하나님의 나라 역사에 편입이 되지만, 하나님 밖에서 이룬 인간의 성취는 제 아무리 위대하게 보이더라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인 아닐까? 하나님은 문명의 성취보다 성품의 성취를 더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2/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우리는 또한, 여기서 죽지 않은 아버지와 어떤 사람보다 가장 오래 산 아들의 흥미로운 상황을 접한다. 창세기 5장에서 우리는 가장 짧게 산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을 낳는 것을 본다. (마소라 사본의 연령을 따라 계산하면 므두셀라는 홍수가 일어난 그 해에 죽었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실 때, 에녹의 나이는 365세였다. 그리고 이 나이는 양력으로 1년에 해당하는 날 수와 같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 두 번(22,24절) 언급된다. 이 표현은 6장 9절에서 노아에게도 적용된다. ‘함께 걷다’는 교제와 친교를 강조한다.
‘탄생-죽음’의 패턴을 깨는 에녹의 기록이 나타난다. 에녹에 관한 기록에는 그 동안 반복되던 ‘죽었다’라는 동사대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가,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가?
성경의 증거를 보면 후자임이 분명하다(히11:5).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구약성경은 에녹과 엘리야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 한다 (왕하2:1〜12).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22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24절)라는 반복된 설명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직역하면. ‘에녹은 그 하나님과 함께 스스로 걸어갔다’가 된다. 이 표현이 노아에게도 사용된다(6:9).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에녹의 독특함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연합을 의미한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친밀한 교제를 누렸던 것이다. 이는 4장에서 본 것처럼 죄가 확대되어가는 상황가운데 에녹이 살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유다서 1:14-16)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3/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기
에녹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첫 인상치고는 너무 평범하다. 누구처럼 아들을묶어서 제단 위에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고, 누구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고복음전파에 헌신하지도 않았다. 또 누구처럼 주를 위해 살다가 돌에 맞아순교하거나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이하지도 않았다.
에녹은 그저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 낳고 그렇게 살았다. 에녹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꾸려 나가기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그에게서는 어떤 특별한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가장 부러워하는, 죽음을 뛰어넘은 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평범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이런 복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들리는 음성이 있다. 평범한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처한 삶의 현장, 결혼해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사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의 현장에 복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에녹이 큰 상급을 받은 출발점은 평범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삶의 리듬을 따라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도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며 자녀를 낳는다. 경력을 쌓고 미래를 준비한다. 그리고 죽는다(자크엘룰).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다. 부모에게서 태어나 부모가 된다.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를 이루지만 이미 그 이전에 가족과 공동체를 이루지만 이미 그 이전에 가족과 공동체가 있었고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
생활을 유지하고 우리의 은사와 재능을 드러내며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일을 한다.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복을 받아 기뻐하기도 한다. 문제점을 만나 씨름하기도 하고 해결을 찾아 감사하기도 한다.
엘룰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인생의 기본적인 상황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매우 특이하다.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신앙이다. 기도에 젖은 삶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삶이다. 사랑하며 섬기는 삶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맹목적으로 인생을 항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키를 조종하고 계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차이점은 비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반항하거나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이 깃들여 있다. 각 사물은 하나님으로 향하는 입구를 제공한다.”(최성식, 「유태교의 신비주의 하씨디즘」. 『문화종교학보?.2, 2006, 371쪽)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에서는 일상(세계)와 하나님과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세계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으로는 신에게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계를 응시하는 것도 신에게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를 신의 안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신의 현전 속에 있다.
‘여기에는 세계, 저기에는 신’ - 이것은 ‘그것의 말(Estrede)이다. ’세계 안에 계시는 신‘ - 이것 또한 하나의 ’그것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너‘안에서 포괄하는 것, 모든 것을 신 안에서 파악하는 것, 이것이 완전한 관계이다.
확실히 신은 완전한 타자(das ganz Andere)-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그의 저서 『거룩한 것』(1917)에서 신성(神聖)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교학과 신학에 도입한 개념,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아래 칼 바르트(K. Barth)가 인간과 이 세계를 떠나서 계시는 신을 가리킬 때 쓰는 중요한 개념의 하나다(절대타자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절대타자는 ‘두려운 신비’로 체험된다.- 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완전한 자기(das ganz Selbe)이다. 즉 완전한 현전자(das ganz Gegenwärtige)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의 ‘나’보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명한 비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에크하르트 같은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이 즐겨 쓴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밀접함을 나타내기 위한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황홀한 신비’와 관련되어 있다.-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범신론(pantheism)이 아니다. 모든 것이 곧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이 표현은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할 수 있다.
4/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우리의 삶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여정을 돌아보자.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영적인 움직임이 무엇이었는가? 우리 여정 속에서 하나님은 주로 어떤 방식으로 당신을 성장시키며 그분을 향하도록 부르셨는가?
당신이 일기를 쓰고 있지 않다면, 기도하는 가운데 당신의 영적 여정에 대해 정기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를 고려해 보라. 일기를 쓰면서 여러 질문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라.
혼자 영적 여정을 떠나도록 부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우리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성령이 항상 우리와 동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 동반자들, 곧 영적 친구들과 영성 지도자가 모두 필요하다.
에녹의 기록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에녹의 삶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함을 보여 준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만이 죽음을 넘어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죽음을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는가? 우리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순서는 있을지라도 이 땅을 떠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 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늘 인식하며 살아가야한다.
영적여정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종종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그려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 동방정교회에서 종종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에서 하나님을 닮는 것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성화(聖化)이다, 위대한 사랑의 사람이 되고, 온전하고 거룩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자아가되는 것이다.
에녹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안식에 드는 영광을 누렸다. 그에게서 죽음을 넘어선 희망에 대한 약속을 본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시대의 불경건과 심판을 증언했던 에녹처럼, 죄에 물들지 말고 의와 경건함 가운데 주와 동행하게 하소서.
거둠의 기도
거룩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주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동행하며 이 땅을 사는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허나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길을 벗어났습니다.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다니고
세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그리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때마다 멈추어 서라 말씀하시고
때로 고통으로 우리가 더 크게 어긋난 길로 가지 않게 돌보신 주님.
우리 삶에 비집고 찾아온 불안과 공허감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현존 앞으로 불러 주심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의 거룩하심처럼 이 땅을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순례자입니다.
에녹처럼 일상의 삶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때에 부름받는 신앙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