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강해

디모데후서 1장 1-8절 / 다시 불일 듯하게

주님의 약속 2021. 7. 25. 10:20

 

어느 사형수의 편지

 

여기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한 사형수의 편지가 있습니다.

슬하에 자식하나 없이 철저하게 혼자 늙은 궁상맞은 인간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편지를 전에도 몇 번인가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참 모습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울이라는 인물을 그저 사도라는 테두리 속에 집어 넣고만 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행한 많은 일들을 그저 당연시 합니다.

그는 사도였으니까하는 고정관념으로 그의 편지를 읽고도 동화됨 없이 바울은 바울로 나는 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참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사도이기 이전에 한 인간 죄수로서 그를 봅시다.

선교사이기 이전에 한 사형수의 모습을 발견합시다.

그에게도 우리와 꼭같은 인간의 나약성과 헛점, 괴로움, 두려움, 내적 갈등, 슬픔, 고난받기를 꺼리는 마음이 있었던 것을 봅시다.

그도 외롭고 억울하고 분했던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바울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낸 위대한 선교사로서 존경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인간적인 바울, 너무도 인간적인 그를 좋아합니다.

늙어 죽도록 자식하나 없이 지냈던 그 인물, 디모데를 제자삼고 내 아들이라 불러주던 그 사람, 디모데가 위장병이 있을 때 포도주를 쓰라며 소상히 권면하던 그런 바울을 좋아합니다.

 

이제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음을 너무도 확실히 알면서도, “디모데야 나 죽기 전에 만나고 싶구나, 겉옷과 특별히 양피지에 쓴 책을 가지고 어서 오라, 겨울이 오기전에 어서 오라고 부탁한 그런 바울을 좋아합니다.

 

이제 그는 첫 번 투옥시처럼 가볍게 석방되지 않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머릿 속에는 이제 갖가지 생각이 정말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와 처음 만났던 그 시절, 선교의 큰 꿈을 꾸며 곳곳을 누볐던 그 시절도 추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의 최후로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1900년 가량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편지는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만약 순교직전의 바울이 우리의 생활현장에 찾아온다면, 그의 표정과 말투는 어떠할까요?

수고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이여라고 할까요? 아니면 이 복음의 사치꾼들아라고 꾸짖을까요?


1. 역사적 배경

 

A.D 64년 네로는 더 나은 로마를 건설하고자 그 도시에 불을 질렀는데, 이로 인해 국민의 원성이 드높아지자 이 방화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베드로전서와 디모데후서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적혀졌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은 주후 64년경 성 밖에서 목 베임을 당했고, 얼마지 않아 베드로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채 순교했다고 한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에 대해 이는 방화죄라기보다 민족적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죽는데 있어서도 야수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개에게 찢기우거나, 십자가에 못박힌 채 밤이 오면 야음을 밝히는 등 비참하게 이를 때 없었다고 기록한다.

바울은 순교직전에 있었고,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황제는 교회를 궤멸시키기고 결정했고, 이단들이 속속들이 고개를 내밀고, 많은 아시아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떠나 변절했다.(딤후1:15) 그렇다면, 바울이 죽고 나면 누가 진리를 위해 싸울 것인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일을 위임하고 부탁하고 있다.(딤전6:20)

 

이 디모데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아직도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다. 바울은 그의 첫서신에서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4:12)고 그를 권면했다. 두 번째 서신에서는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2:22)고 그에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어리고 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지도자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교회는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두 번째 편지를 경청하는 것이 절박하게요청된다. 왜냐하면 도처에서 우리는 복음을 쥐고 있는 그들의 손을 느슨하게 늦추고 있고, 그들의 손에서 복음을 싸구려 물건처럼 취급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세계선교기도 20217월호에 보면, 이런 기사가 있다.

여론 조사 기관 한국 갤럽이 지난 520일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에 의하면, 개신교 17%, 불교 16%, 무종교 60%로 조사되었다. 무종교 인구가 늘어나면서 비종교인들의 종교호감도도 크게 줄었다. 호감있는 종교로는 불교가 20%, 카토릭 13%, 개신교 6%에 그쳤다.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 종교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응답은 1(1984(, 2(1989) 조사 당시 각각 68%, 70%에 달했지만, 2021년 조사에는 18%까지 내려갔다. 이러한 이유는 무종교인 절대다수가 종교는 사회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갤럽은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을 청년층에서 찾고 있는데, 20대와 30대의 종교 인구는 각각 22%, 30%로 꾸준히 감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신앙의 언행일치와 진정성을 회복하여, 비종교인의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가 회복하고, 젊은 세대를 향하여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전문의 문이 다시 열리길 기도하자.

 

그리고, 이 시대는 종교혼합주의와 다원주의로 인해, '오직예수'라는 복음 메시지는 타문화를 이해하려는 소통이 없는 일방적 메시지로 각인되어 기독교가 역차별 당하는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 복음의 신성한 위탁을 지키며 그것을 전파할 의지를 지닌 그것을 위해 고난도 각오할 준비가 있는 디모데와 같은 일꾼을 이 시대는 요청하고 있다.

 

 

2. 바울과 디모데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자로 자신을 소개한다.

우리가 맡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약속이다. 생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그 자체인 복음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분이 아니신가?” 우리가 맡은것에 대한 긍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파송 받아서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성도와 이웃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의 평가 또한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는가?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불렀을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기 때문이라고“(고전4:14,15)했다. 우리에게는 영적 아비와 영적 자녀가 있는가?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3. 바울이 디모데에게서 생각한 것

 

영적 아비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한다.

어느 시집 제목에 넌 가끔가다 날 생각하지만, 난 가끔가다 다른 생각한다는 것을 보았다. 바울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한다고 표현한다.

마치 아이를 가진 어미가 아이에 대한 긴장감을 순간도 놓치지 않듯 기도가운데 그를 생각한다고 했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며, 너 보기를 원하며 청결한 양심과 네 속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한다고 한다. ? 이것이 내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스승들이 우리에 대해 이런 기도와 간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영광과 면류관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목사님과 간사님 여러 순장들에 대해 좋은 것을 함께 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 바울이 디모데에게서 생각나게 하려한 것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우리 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감과 능력이 꺼져가는 불꽃처럼 생명력을 일어갈 때 우리에게는 다시금 불을 댕길 수 있는 기름이 필요하다.

 

바울은 안수를 통해서 디모데의 식어진 불꽃을 다시 일으키려한다.

우리의 복음에 열정에 사로잡힌 때를 생각해 보자. 복음의 파워와 뜨거움을 경험하고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이고 생명인 것에 잠 못 이루며 흥분해 하던 것을 생각하자. 어느새 우리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회 다니는 썬데이 크리스챤, 종교인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 그 능력과 생명력이 다시 불일 듯 하도록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름 떨어져서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는 차에게 주유소가 필요하듯, 영적으로 어두운 밤을 지나며 침체된 자들에게 주유소(主有所)가 필요하다. “주여 꺼져가는 심지에 성령의 기름을 부으셔서 세상을 밝히는 생명의 빛으로 불일듯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은사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뜨거운 열정이 필요하다. 땔감이 있어야 불이 타오르듯, 은총이 언제나 뜨겁게 타오르려면 우리의 기민함이 필요하다... 이 은총의 불을 타오르게 하거나 꺼뜨리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게으름과 부주의는 이 불을 꺼뜨리고 경계심과 성실함은 이 불이 살아있게 한다. 은총은 우리 안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야 한다,(요한 크리소스틈,디모데후서 강해)

 

 

그는 주의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바울은 롬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이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또 어떤 이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가 밥먹여 주냐?’ ‘차라리 내 주먹을 돈을 믿겠다’ ‘진리가 그렇게 쉬울 리가 있느냐?’하며 우리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미혹하는 시험은 강하고 교활하다. 만일 디모데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바울이 이러한 말로 디모데를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 여론에 아주 민감하며 사람들의 소리에 너무도 쉽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굴복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것이 인간에게 만만한 시험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8:38)는 엄중한 경고를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 사역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One Point

 

우리가 고난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인 능력이며, 자기 주장이나 허영이 아닌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이며, 능력과 사랑가운데 거하고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하는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는 근신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과연 현실의 고난과 부끄러움으로 인해 생명의 약속인 복음의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 쏙 빠져 있으려고 틈을 엿보는 자가 아닌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일깨우려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넘어야할 산과 헤쳐 나가야 할 바다가 놓여있다. 이 믿음의 전쟁을 앞두고 나약해 있기보다. 복음을 위탁받은 디모데처럼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믿음의 열정을 불일 듯하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