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8편 / 내가 환난중에 다닐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않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_David Livingstone
1/ 찬양의 표현(1-3절)
[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2/ 찬양의 확장(4-5절)
[4]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5]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3/ 찬양의 이유(6-8절)
[6]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네가 바라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그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라. 후회는 이내 분노로 돌변하게 마련이다. 네 모든 환경을 내가 다스린다. 내 능한 손 아래서 겸손해라. 네 인생에 내가 행하는 일을 기뻐해라.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그리해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 안에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생을 위해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세상 일에 놀라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에 내게 중심을 두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시험을 만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네 시선을 내게 고정해 두는 일이다. 내가 생각의 중심에 있으면, 어떤 환경이라도 내 시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땅에서 우리가 살 날의 수를 정해두셨다.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실 선한 일을 미리 정해 두셨다. 그러므로 매일의 도전에 직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위뤄질 것이라는 담대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전진해야 한다. 점점 더해가는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생을 향한 계획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을 만물보다 높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138편의 핵심 메시지다. 주님은 위협하는 대적에게서 다윗을 건져주시고, 그의 생명을 유지시켜주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극적인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더 강한 확신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 가운데 계획한 뜻을 이루실 것을 신뢰한다. 그는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표현한다.
_스티븐 J. 로슨 『Main Idea로 푸는 시편 76-150』. 김진선 옮김. 디모데, 2008.643쪽
인생은 미완성 교향곡이다. 인생은 누구나 자기의 모든 꿈이 완벽하게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꿈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완전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시지프의 신화처럼 오늘도 저 정상을 향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행여나 은혜를 주시면 후회 없는 마무리로 완전을 고백할 소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아무도 완전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주인 되신 이의 자비와 은혜를 따라 완전케 하실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은 결코 무리한 욕망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룩한 소원이다. 우리보다 앞선 인생을 살아간 선배들 중에 우리를 시기나게 하는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생애 속에는 모두 이런 거룩한 욕망의 이끄심이 있었다.
그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사람에게 먼저 있어야 할 일은 감사와 찬양이다. 미래에의 기대는 과거에 함께 하심에 대한 감사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다. 미래의 설계는 과거의 성취의 기쁨에서 그 비전과 용기를 얻는다.
시편 기자는 겸손하여 주 앞에 자신을 낮추실 때 언제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시고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는 다시 자신을 낮추고 그의 불확실한 미래를 주께 의탁한다. 적어도 주 앞에 설 때에 후회 없이 인생을 결산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_이동원, 『묵상의 샘』. 압바암마, 2014. 294-295쪽
동양적 사유에서 이 제목이 떠올리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의 첫 장이다. ‘말로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도라 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요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時 有名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정녕 영원한 것이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규정하는 언어의 한계에 매일 수 있을까? 참으로 영원한 것은 딱히 이러한 것이라고 띠지를 붙여 그 안에 가들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히브리시인은 여호와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하자고 권면한다.
도덕경적 사유가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유혹에 깨어있고자 한다면, 성서적 사유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과 ㅁ라씀에 오롯이 뛰어들어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전자가 유한한 인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런 인간이기에 오롯이 투신할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서로 멀리있지 않다.
다만 히브리 시인은 하나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 안에 영원하신 분을 감히 박제하려 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어와 자구 너머의 것을 추구하였으리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없어지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을 넘어서는 은혜 안에 녹아지는 것! 그것이 그분의 이름과 말씀의 능력임을 맛보면 충분하다. 늘 말씀을
_ 오경웅. 『시편사색』. 송대선 옮김. 꽃자리, 2019. 737쪽
시인이 이 “높이”에 대하여 말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 같은 자가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 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무더기에서 드신다•…”
(시 113:4—7).
인간은 감히 접촉할 수 없는 거룩함과 고상함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의 가장 비천한 자들,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그 천함에 써 일으켜 높이 세워주신다고 했다.
“교만한 자를 아신다”는 것은 교만한 자들의 말로를 아신다는 뜻인데, 그 말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높아졌던 그만큼 낮아지고 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문 속에 잘 나타났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시며,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 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을 차지하게 하신다”(삼상 2 : 7-8). 이 시인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고 있는 빈부귀천의 질서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바꾸어 놓으실 수 있음을 말한다.
_ 김정준. 『시편명상』. 한국신학연구소. 2004. 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