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21-31절 / 하갈과 사라
짝퉁이 횡횡하는 사회이다. 언뜻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게 바로 짝퉁과 진품
의 차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진품 그리스도인과 무늬만 그리스도인은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 신앙의 외적 행위만으로 신앙을 다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는 본문에서 바울은 비슷하지만 분명한 진품신앙인과 짝퉁신앙인의 모습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 메시지
바울은 어머니의 비유를 든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이요, 다른 아들은 첩에게서 난 아들이다.
홍길동전에서도 보면 나오지만,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도 본부인의 아들은 적자라고 해서 아버지의 대를 잇는 권리가 주어지지만, 첩은 아들은 서얼이라 해서 아무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것을 본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본부인인 사라에게서 난 아들이 이삭이고, 애굽에서 데려온 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었다.
바울은 서로 다른 어머니를 언약에 비유한다.
아무리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권리가 난 자격이 같은 것이 아니다. 기초하고 있는 언약이 다르면 자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율법의 언약을 어머니로 삼고 있는 자는 율법의 노예일 수 밖에 없고, 복음을 언약으로 삼는 자는 성령의 부으심이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셨다.
그런, 오랜 세월이 지나고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 당시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들여서 그 몸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고”라는 말이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과 방법대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인데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을 수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으니, 인간적인 상식과 방법대로 육체적인 사고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보려 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많은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기의지와 자기 노력을 비유로 삼는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준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이것은 이삭으로 대표된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이삭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바로 복음안의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는 율법의 속박아래 있고, 하나는 복음안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율법의 멍에와 저주의 짐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에 굳게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권고한다.
갈4:31-5:1을 읽어보자.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을 전도하시며 외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짐은 바로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말한다. 주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 짐을 벗기러 오신 것이다.
당시의 거짓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또 다시 멍에를 지우고 있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이 바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떤가? 어떤 이들은 특별한 영적 체험을 강조하고 어떤 이들은 특정한 종교규율을 정해 놓고 구원받는 사람이면 당연히 보여져야할 표시들로 여기고 있다.
당시에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하여 느끼는 콤플렉스는 영성에 대한 것이었다. 유대교는 입교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그들이 지켜야할 규칙 등이 모두 다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먹어야 할 것. 먹지 못할 것. 해야 할 일과 안 되는 일이 모두 명확하게 언급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식으로 손에 잡히도록 주어지는 것이 없다. 복음은 은혜로 그저 받은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믿을 때 은혜 가운데 기뻐하던 사람이 시간이 흐를수록 복음을 너무나도 막연하게 여기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남용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것에 실망한 나머지 유대교처럼 무엇인가 구체적인 규율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성령하나님을 통해 우리 성품이 바뀌고 삶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포인트
사람 안에는 죄 짓고 싶어 하는 본능이 야수처럼 존재한다. 이 야수를 다루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율법은 이 야수를 철장에 가두는 방법을 쓴다. 그러나 야수는 그 철장을 부수고 달아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런, 은혜는 야수를 달래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쓴다. 사람의 본성이 변화될 수 잇다면 철장을 제거해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일을 이루어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 성령에 의해 통제되는 본성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란 죄악을 본성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철장을 벗어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율법에 멍에를 가지고 있다면 벗어버리자.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자유를 우리 육체의 방종의 기회를 삼는다면 회개하자.
우리의 예배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형제사랑은 천국가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 본자로서 자연스러운 삶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