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1-7절 / 때가 차매 / 김광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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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조항들 도덕적 규칙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초등교사(몽학선생)과 같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는 이전의 율법시대에 초등교사의 눈치를 보며 종노릇 하던 시간이 끝이나고 이제 종의 신분이 아닌 아들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대교도 실제로 노예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기까지 진정한 자유인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고 새 옷을 입은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유인인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아래 매여 있었다.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더 이상 율법의 감시아래 있지 아니한다.
믿음 안에서 자유한 자가 되었다. 다른 곳에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고, 그리스도게서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다고 하는 두 개념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바울은 단지 그의 ‘신분’을 언급하는 것이다.
_ 아란· 콜. 「갈라디아서」. 『틴델신약주석 시리즈』 9. 김효성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39쪽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깨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태어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율법에 매인 사람의 모습으로 나셨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격이신 그 아들 예수님이 친히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 분이 왜 마리아의 몸에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야 했나?
오늘 말씀처럼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성육신이 일어난 시점을 추정해 보면, 주전 5년, 즉 헤롯 대왕이 사망한 주전 4년보다 1년 앞선다.
하필 그때가 된 이유가 있을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축복하겠다 약속하신지 2천년이 흐른 뒤다.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바울은 하나님이 “기한이 찼을 때”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첫째, 제국에 ‘팍스 로마나’시대가 왔다. 곳곳에 군대가 배치되어, 평화를 유지하고 대륙의 도둑과 바다의 해적에게서 여행자들을 보호했다.
둘째, 헬라어가 제국 공용어가 되어 70인역(헬라어 구약성경)이 통용되어 복음전도가 쉬워졌다.
셋째, 사람들 사이에 영적 갈망이 커졌다. 로마의 구닥다리 신들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신비 종교들은 개인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영적 만족함을 주기보다 오히려 영적 갈급함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회당 가장 자리에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높은 윤리적 기준에 매료되었다. 이렇게 해서 10년만에 (주후 48-57년) 바울은 갈라디아,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 이렇게 로마의 네 지방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세계복음화를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
_ 존스토트. 『나의 사랑하는 책 (교회력에 따른 매일성경묵상)』. 이재혜·최효은 옮김. IVP. 2012. 150쪽
우리가 져야할 마땅한 죄값을 대신 치루셨다.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셨다. 그 아들의 영 곧 성령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제, 우리는 아들의 명분의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특권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릴 유업을 우리는 동참하고 있는가? 이 땅의 것을 얻지 못했다고 원망하지 말고, 이 땅의 것을 얻었다고 자랑하지도 말자. 온 천하를 다 얻고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다윗처럼 모든 것을 다 잃고도 하나님 앞에 찬송했던 욥처럼.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하는 다른 것들과 친밀해 질 수 밖에 없다. 바울사도는 9절에서 말한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하려 하느냐?” 갈라디아 5장 1절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