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말씀

125th 약속 /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_어버이주일 / 김광영 목사

주님의 약속 2021. 5. 9. 10:47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울던 엄마를 본 후론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2003 <한국문인>을 통해 등단한 심순덕 시인의 서정시이자 자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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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어떻게 그림 그리는가?

깐깐한 순경. 혹은 무서운 법관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지 않는가?

성경은 우리가 무서워 하는 종이 아니라 기업을 이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때때로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을 대하기 두렵게 여겨지더라도 숨어다닐 것이 아니라, 솔직히 나아와 잘못을 회개하고 그 분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 분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을 행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의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메시지


 

바울 선생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처럼 아들의 특권과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형제들아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그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의 모든 형식을 폐기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자유자가 된 것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유대인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그들과 같이 된 것은 그들을 얻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었다.(고전 9:19-21)

 

그들에게 거리감을 없애고 일체감을 가지고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청하고 있다.

 

우리는 이웃들을 대할 때 어떠한가? 우리와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지옥자식으로 단정 짓고 있지 않는가?

우리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가운데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기까지 낮아져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그들의 눈높이로 낮아져야 한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병들고 볼품없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6:11에 보면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한다. 이 구절을 두고 바울이 안질로 인해서 편지에 큰 글자를 적었다고 말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어쨌던 바울의 육체의 약함에도 그로 인해 바울을 멀리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으로 섬긴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우리도 연약함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특히, 교역자를 대할 때, 외모로 보지 않고 그가 하는 직책을 보고서 존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한 나라의 대사는 그 개인이 아니라 그 직책으로 환대받지 않는가?

복음을 위해서 영적인 아비와 스승으로 세우신 자들을 우리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누가 존중하겠는가?

 

이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나약한 모습까지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한,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던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가 왜 그처럼 철저하게 변했는지 의아해 한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는가? 그것보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미혹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저희(거짓교사)가 너희에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그들은 칭찬받고 싶어서 칭찬한다. 여기에는 거짓교사들이 인기를 독차지 하면서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를 빼앗고 있는 모습이 암시된다.

 

거짓선생과 달리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보고자 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양육하는 것을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는 산고에 비유하고 있다.

산고의 고통.. 진통간의 달콤한 잠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얼마나 아팠으면 그 짧은 휴식에 잠이 들까 싶었다.

그런데, 애기가 첫울음을 터트리고 태어나자. 그 아기를 엄마 품에 안길 때 평온해 하고 기뻐하던 아내의 모습이 생각난다.

예수님 말씀처럼. 여자가 해산의 때가 가까워 고통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후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살을 찢는 아픔도 잊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어른들 직분자들 새가족들과 새신자 혹은 학생들을 양육하고 관리하는 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저 왔는지 안 왔는지 눈도장 찍는 정도는 아닌가?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 고통하듯 한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절규하고 기도하며 가슴아파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믿음의 자녀가 단지 교회 출석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까지 수고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넘어 삶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도록 까지 돌보아 주어야 한다. 이 해산하는 수고의 고통과 또 기쁨을 맛보자.

 

우리는 또한, 여기서 성도와 교역자의 사랑을 본다.

성도는 교역자를 존중히 여겨 눈이라도 빼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고, 교역자는 해산하는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우리는 쌍방 간에 이런 사랑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은혜가 충만할 때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했지만, 은혜가 소실 될 때는 내가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반문케 된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받기는 참으로 어려워도 쏟기는 참 쉬운 것 같다. 우리는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이 은혜를 지켜야 할 것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그는 이 편지를 쓰면서 지금까지 호통 치듯 강력한 어조로 말해왔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직면 대면하면 부드럽고 온유한 말로 격려하고 싶다는 것이다.

 

의심이 있다는 말은 어찌할 바 몰라 당혹스럽다는 말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정확히 모르므로 당혹스러워서 그들을 직접만나 그 의문을 풀고 싶다는 생각이다.

 

포인트


 

바울사도가 직접 가르친 갈리다아 교인들도 거짓 가르침에 유혹되었다면, 오늘날 사역자들이 지도하는 한국교회 교인은 얼마나 유약하지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 예수께서 한국교회를 온갖 잘못된 가르침과 이단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간구하며 바른 믿음의 교리위에 설수 있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