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th 약속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교회에 왜 오는가? 누군가는 이런 대답을 했다. “예배 마치고 집에 빨리가고 싶어서” 예배를 안드리자니 하나님이 번개를 치든지 내 몸에 병이 나게 할 것같고, 예배를 드리자니 졸립고 다른 하고 싶은일 해야할일은 많고 그래서 빨리 어떻게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가면, 속이 편하고 즐겁게 놀 수 있고, 어딜 가도 마음은 편해지는 것 같기 때문은 아닌가?
예배는 왜 드리는 것입니까? 성경에 많은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 율법을 다 지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바닷 게가 게아들 게 딸에게 너희는 똑바로 걸어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옆으로 걸을 수 밖에 없죠? 게 딸 게 아들도 옆으로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옆으로 걸어서 게가 아니라, 게니깐 아무리 앞으로 걸으려 해도 옆으로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친구가 나를 화나게 할 때 화 내기는 쉬워도 화 참고 인내해주기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화 내어야지 꼭 화 한번 내봐야 겠어 결심하지 않아도 화는 저절로 터져나옵니다. 친구를 이해하고 사랑하기는 얼마나 다짐하고 인내하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안테나를 잃어버린 개미처럼 열심히 가긴 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 사람들과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친구 유대인 몇이 오자 그는 그들에게서 무슨 말을 들을까봐서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 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비난이나 판단을 꺼린다. 그래서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을 일삼는 것이다. 베드로도 유대주의자들의 판단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인간적 행동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눈치나 판단을 의식하지 않고, 실족하지 않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1/ 율법에 대해 죽지 못한 베드로
바울은 이전에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을 들려준다(11절).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난 적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자들, 즉 율법주의자들이 볼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던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도 이 외식에 영향을 받았다( 12〜13절).
때로는 불필요한 오해와 다툼을 피하기 위해 지혜롭게 처신해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양보와 타협은 전혀 다릅니다. 복음의 진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 어떤 율법의 공로나 혈통의 자격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희석한 베드로를 준엄하게 책망했다(14〜16절).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데, 베드로는 유대주의자들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베드로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진리를 가지고도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판단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두려움을모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가 한 일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며 책망했다(14절). 그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이 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교훈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체면을 봐주는 것보다 생명의 복음이 더 중요하다.
2/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에 마음을 곱게써야 천당을 가지 예수믿는다고 천당가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마음을 곱게 쓴다고 해도 50보 100보 차이입니다. 50보 100보는 중국고사에서 나왔는데, 전쟁을 하는 군대가 적군에게 밀리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얼마의 군인들이 삼십육계 즉 도망을 쳤습니다. 전쟁의 장군이 밀리던 아군의 사기를 북돋워 결국 역전승을 했는데, 그 때에 도망한 군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 병사가 100보를 도망했는데, 자기는 50보 밖에 안갔다고 자기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장군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1000보를 가던 1보를 가던 적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등을 돌려 도망한 것은 도망한 것인데 자신은 다른 병사보다 조금 낫다고 뻐기는 것이지요.
사람이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해도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다 죄인입니다. 거짓말을 한번도 안하고 사는 사람있습니까? 컨닝 한 번도 안한 사람 있습니까? 친구 한번이라도 욕 안하고 미워하는 마음 품어보지 않은 사람있습니까? 하지만, 50보 100보차이입니다.
그 많은 성경의 율법들을 다 지켜 구원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래 율법이 구원을 얻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죄인줄 모르는 타락한 본성의 인간이기에 이것은 죄니라라고 경계선을 그어주신 것입니다. 경계선 그어놓았다고 우리가 안 넘어 갑니까? 얼마든지 넘어갑니다. 그 선은 우리가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식일 뿐입니다.
바울이 게바를 책망했던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다른복음의 유혹을 받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바울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율법을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15〜16절).
의무를 다하고 선하게 살면 사람의 인정을 받거나 마음이 편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할 만큼만 하면 되는 세상의 상식을 신뢰하지 말라.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20절).
바울의 반대자들은 믿기만 하면 소용없다고 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바울의 흠을 잡아서, 바울의 복음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 예수님은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17절). 바울은 자기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으며,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 한다 (18〜19절)
십자가가 교회에 왜 있습니까? 봐라 죄지은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공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올가미나 전기 의자같은 것으로 교회에 올려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 지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값으로 당할 고통을 그분이 대신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다는 복된 음성 바로 복음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교회당에 세워진 것입니다.
3/ 율법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고
만일, 우리가 착하게 살고 율법을 지켜서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합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은 십자가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속에 참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이어진다( 20절). 복음의 최대 역설은 죽음을 죽음으로 이긴디는 것. 한 죽음이 다른 죽음을 이긴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고 율법의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나의 삶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인 니와 율법의 존재에 일대 변화를 기져 왔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이 지닌 의미를 매우장엄하게 묘사한다. 그 삶은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삶이다. 그 삶은 율법에 대해서는 죽은 삶이요,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삶이다 19절). 율법에 죽었으니 더 이상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는 삶이다. 하나님을 향해 살았으니, 율법을 위해 살아서는 안되는 삶이기도 하다. 사도는 이 삶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규정했다 20절). 또한 이 삶은 바로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 우리 안에 우리가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말고. 형편과 상황을 보지 말라. 우리 안에 지금도 살아계신 분, 죄와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라. 믿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삶.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결코 폐할 수 없다( 21절).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예수님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신순종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감당해 주신 십자가의 대속에 대해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 것만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요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온전히 드리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고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욕구대로 살고 있다면 여전히 자신이 주인되어 살고 있는 것. 또 자신이 지은 죄들을 하나님이 은혜로 다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기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불신자의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자는 자신이 죽고,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 안에 사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합니다.
지금 우리는 왜 살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분의 은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그를 살리기 위해 물에 뛰어 들
었다가 그를 잡아서 땅으로 끌어 올리고 자신은 힘이 빠진 상태에서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죽어야 할 자리에 누군가가 대신 죽어준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몸을 내어준 사람으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헌금하고, 찬송하는 것은 바로 물에서 건짐받은 사람이 그 은혜에 감사해서 그것을 표현하
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종이냐 아들이냐/그리스도인의 자유(마르틴루터)
그리스도인의 지유에 대한 글에서 다루는 두 개의 주요 논제는 명백히 모순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면서 또한 종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생각하는 자유와 종의 관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님이심에도 사람의 몸올 입고 세상에 오셨으며, 스스로 울법 아래 놓이셨다. 그는 자유인이며 동시에 종으로 사셨다.
루터는 이런 모순적인관계를 기능하게 만드는 원리를 사랑에서 찾는다. 강제적인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며 사랑은 오직 자유인으로서 행할 때만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랑은 섬기는 것이며 사랑의 대상에 대해 종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종으로서 사는 것을 기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