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말씀

120th 약속 /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 / 고전 15장 12-20절

주님의 약속 2021. 4. 4. 12:41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존 던

인간은 자기 혼자만의 섬이 아니다.

사람 각자는 전체의 일부로

대륙의 한 조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의 땅은 그만큼 줄어들며,

해안으로 뻗어 나온 땅도

그러할 것이고,

그대와 그대의 영지가 씻겨 내려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 사람과 이해를 같이하는 나로서는

그 어느 누가 죽더라도

손실이며 슬픈 일이다.

 

따라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러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너를 위하여 울리므로.

 

무덤은 가장 좋을 때에도 불쾌한 장소다. 특히나 도굴꾼이 많고 유령 이야기나 으스스한 사건이 더 흔한 문화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이유로 부활절을 두려워한다. ‘현대서구 사회의 무덤지기들은 종교는 위험한 헛소리에지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만약 이라는 존재가 있다 해도, 그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존재이고 오직 개인에 국한된 영적인 삶에만 관심이 있다. 또한, 진보와 기술과 과학이 패권을 쥐고 있어, 우리를 황금빛 미래로 데려다 줄 것이라 낙관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없다고 단정한다. 일리아드를 적은 호메로스도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음을 알았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이 첫 부활절 아침에 어떤 사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의 생각과 상상에는 큰 충격이 가해졌다. 만약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새로운 권력이 이 세상에 풀려나온 셈인데, 그 권력은 그동안 인류에게 알려진 모든 다른 권력을 초월한다.

 

오 하나님!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하였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쇠사슬을 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여 주소서.

 

-188545일 부활절 아침 아펜젤러의 기도문-

 

1/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에베소의 후메내오와 빌레도도 이런 거짓 교리를 퍼뜨렸다딤후 2:17. 이들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혼은 선한 것이며 육체는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한 영혼은 부활하지만 악한 육체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마저 부인했다. 교회 내에 잠입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고린도 교회를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을 가르치며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사상을 배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녕 부활하셨고 죽은 자들의 부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111절은 부활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확증한다. 부활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미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부활의 복음을 다시 일깨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복음을 너희에게 알게하겠다고 말한다(1). 바울은 부활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했지만 그들 중에 부활에 대해 의심하거나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12).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수많은 증인이 있음을 볼 때 확실한 사실이다.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을 나열한다. 5절에서는 게바와 열두 제자를 언급한다. 6절에서 500여 형제. 7절에서 야고보와 모든 사도. 8절에서 바울자신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7절에서 말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열두 제자에 대해서는 이미 5절에서 언급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많은 사람에게 직접 나타나셨다는 것은 부활에 대한 강력한 증거다. 가장 확실한 증인은 마지막에 언급된 바울 자신이다.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8는 말은 개인 체험의 확실한 증언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증인으로 제시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지금살아 있다는 것 6은 증언의 확실성을 보증한다.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만나보면 알 것이다.

 

3/ 우리의 부활

 

바울은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확증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본문에서 성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논증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의 일부는 성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했다12. 전부는 아닐지라도 고린도 교회의 영향력 있는 일부 사람들이 성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바울이 보기에 성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이 이미 그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12.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성도의 육체적 부활도 보증한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논박한다13.

부활하지 않는 예수는 저주의 심판을 당해 요절한 유대 혁명가에 불과하고사망에서 우리를 살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부활만이 성도의 죽음을 언젠가 깨어날 잠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가진 소망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누릴, 죽음 이후의 삶과도 연결된다. 만일 성도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그들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삶을 훈련한다. 그러기에 만일 부활이 없고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도의 고난과 훈련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을 주안에서 행복하게 살뿐 아니라죽음 이후도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부활 후 저세상의 삶,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만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진리를 따라서 새로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이 땅을 살았고, 새로운 창조를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믿었을 뿐 아니라 전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신기루를 좇은 것이며, 거짓에 속은 것이며,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바라는 그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아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까지도 부인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께서도 육적으로 부활하지 않았고 영적으로만 부활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육적인 부활은 일어나지 않으며 영적인 부활만 일어날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그리스도가 남긴 '정신의 부활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격적인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교리나 가르침 속의 예수님만 구한다면우리도 입술로만 부활을 믿고 실제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부활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면 우리는 누구보다 더 불쌍한 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셨고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본 절에서 부터 단언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첫 열매는 뒤이어 다른 열매들도 수확할 것임을 보증한다. 예수님이 첫 열매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자들이 그와 같이 다시 살아날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더 많은 수확, 즉 성도의 부활이 있을 것을 예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성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첫 열매를 보고도 이후의 열매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결론

 

부활의 소망을 확신할때 그리하여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한다. 이것은 성도의 죽음이 주님과 함께 거하심으로 시 23편에 나오는 것 처럼,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되셨기때문이다.

그 육신은 이제 종일 일하고 힘들어 곤히 잠드는 모습으로 여기 누우셨다. 그것을 보고 흔들어 깨우고 슬퍼 통곡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된 성도가 자신의 맡은 일을 감당하고 그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신다. 예수님 믿는 신자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육신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 품에서 거하신다. 7:13에 보면 흰 옷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나온다.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예수님이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신니다(7:13-17).

 

장례식에서 영결식이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예수 믿는 성도들은 이것을 영결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환송예배라 한다. 그 영혼은 주님과 함께 거하시고, 그 육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었다고 한다. 주님이 마지막날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안에의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자들도 있다. 하지만, 주님안에서 있는 자들 큰 슬픔가운데서도 위로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소망없는 다른 이들과 같이 슬픔에만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썩게 될 몸으로 흙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은 썩지 아니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된다고 성경이 말씀한다. 마치 씨앗을 심을 때 흙에서 죽는 듯 하지만, 새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처럼 우리의 약하고 늙고 병든 몸을 심지만, 늙지 않고, 병들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성경을 통해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