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말씀

3rd 약속 '굽혀 땅에쓰시니' 요한복음 8장3~11절

주님의 약속 2018. 10. 6. 13:28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신다.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기록하셨다는 유일한 구절이다. 본문에서 2번이나 등장한다. 8절을 보니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다. 왜 예수님은 그 몸을 굽혀 땅 위에 손가락을 대셨나? 왜인가? 우주의 왕이신 그분께서 이렇게 몸을 굽혀 땅위에 쓰셔야 했나?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 앞에 여인을 끌고 옴 (1-5절)


  주님은 감람산에 가셨다가 아침이 되어 ‘다시’ 성전으로 오셨다. (눅 21: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공생애 막바지에 예수님은 감람산과 성전을 오가신다. 그 아침에 백성들이 그분 주위로 몰려들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앉으셨고, 그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런 평온한 풍경이 삽시간에 험악하게 바뀐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등장이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선생이다. 이들은 존경의 뜻으로 ‘랍비’라고도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 서기관, 그리고 경건의 수준이 높아 이레에 2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는 율법을 몸으로 실천한다고 떠드는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그냥 나오지 않았다. 한 여자를 끌고 온다. 다름아닌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이다. 그를 그 무리들 가운데 세운다. 예수님이 서신 그 자리에 군중들의 눈이 집중된 자리에 끌어와 세운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말은 날카롭다. 예수님을 향한 호칭을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뉘앙스는 뭔가 목에 가시가 걸리게 하는 말이다. 전문맥 요한복음 7장 후반절을 살피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보여준다.
  (요 7:47-52)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을 선지자나 랍비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갈릴리출신의 백성을 현혹하는 근본없는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예수님께 선생에 해당하는 단어 ‘디다스칼로스’를 쓰고 있다. ‘랍비’와 비슷한 율법교사로 추켜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들고나온 문건은 모세의 율법이다. 그 율법에 근거해 이 여자를 돌로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어찌 말씀하시겠나이까? 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율법 어디에 이런 근거가 있는가?

   (신 22:23-24)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랬다. 그들은 기세 등등했다. 모세의 율법의 조항대로라면 이 여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것도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여인을 성읍 문으로 끌어낸 것이 아니다. 성전 안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두고 무리들 가운데 둘러서게 만들었다. 왜인가?
  6절에서 요한은 그 저의를 밝혀주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예수님께 올가미를 걸기 위해 이 여인을 성전 안으로 잡아온 것이다. 그리고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따져 묻는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왜 이 질문이 예수님을 올가미로 고발한 근거를 마련하는 고소거리가 될까?
   딜레마를 보여주는 질문이다.
   “돌로치지 말라”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죄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의회에 고소거리가 된다. 어떤 식으로도 법에 구속된다.
   “돌로치라” 그것은 로마식민지 유대당국에는 사형집행 권한이 없다. 로마총독에게만 있다. 그리고 로마의 실정법으로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 잡혔다고 사형죄에 해당하지 않다.
    또한, 예수님이 평소에 말씀하신 말씀
   (마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까지 사랑하라신 그분의 말씀과도 위배된다.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도 예수님은 민중의 신임을 잃거나 산헤드린공회에 고발되거나, 로마법정에 고소될 수 있다.
 




2. 예수께서 몸을 굽혀 쓰시고 답하심 (6-8절)


  그 날카로운 돌 같은 율법선생들의 질문에, 사람들은 아마도 웅성거렸을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하실까?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 나오는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목한다.
  그런데 주님은 몸을 굽히신다. 말씀을 가르치시며 앉으셨던 자리에서 땅으로 향하사 손가락으로 쓰신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쪼그리고 앉은 그분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데, 벽이나 종이에 낙서하거나 스마트폰에 뭔가를 적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분은 그들의 질문이나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으신다.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신다.
  도대체 뭘 쓰신 것일까? 글을.. 아니면.. 그림을.. 아니면 어떤 기호를... 성경은 이것에 대해 침묵한다. 예수님의 입의 대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땅의 그 손가락에 주목했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의 고함소리 그들의 물음이 다 그쳤다. 오직 침묵만이 성전 안에 감돌고 있었다.
  땅바닥에다 말없이 낙서를 하고 있는 그분을 보고, 그들은 마침내 그분을 꼼짝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지, 어서 대답을 하라고 재촉하였다. 마침내 그분이 앉은 채 고개를 들어 둘러선 자들을 쳐다보셨다. 그분이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한 마디 말을 마치고 그분은 다시 바닥에다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방은 물속에 잠겨버린 듯 고요해졌다.
  NIV 영어 성경을 보면 이렇다.
“만일, 당신들 중 누구라도 죄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첫 번째로 그녀를 향해 돌을 던지시오”
 
  율법은 죄를 정한다.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의 핵심조항인 십계명을 보자. 특히 십계명의 6~9계명을 보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너희 이웃에 대해 거짓증언 하지 말라. 하지만, 10번째 계명을 주목해 보자. 이 계명은 어떤 ‘행위’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탐내다는 이 말은 ‘욕망하다’는 말이다. 금지된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욕망을 가르키는 것도 이 말이다. 이 탐심에 대해 자유로운 자가 누가 있겠는가?
  열 번째 계명에 대해 존스토트(John Stoot)는 말한다.
  ‘이 계명은 십계명을 외적인 법 수준에서 내적인 윤리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탐심은 마음과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음욕과 간음, 분노와 살인과의 관계는 탐심과 도둑질과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하지만, 탐심은 그 이상을 넘어가고 있다. 역으로 추적하면 욕망하기 때문에 탐하기 때문에  도둑질만이 아니라 상인과 간음과 거짓증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계명은 우선 가장 급한 것부터 방비한다. 폭력을 멀리하기 위해 폭력적인 행위인 살인을 금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계명은 곧 폭력의 근원인 욕망까지 금지시킨다.
 그러나, 욕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욕망을 죄로 정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탐하지 말라하신 율법은 지켜서 애당초 지켜서 구원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아니다. 도리어 죄를 밝히 드러내어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약 2:10-11)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딤전1:9-10)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렇게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사탄은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사탄은 도덕이나 금기를 무시하고 우리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살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해방된 기분을 맛본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 말에 속아 마음대로 하다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를 기다리는 함정을 알려주고 경고하기 보다는 우리를 그 함정에 빠뜨린다. 사탄은 유혹자 이다. 하와를 유혹한 이후 이 땅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해 왔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한자이다. 율법이 죄를 정하고, 사단은 그 율법을 넘어 우리에게 해방을 주는 듯 하나 그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3. 예수께서 홀로남은 여인에게 용서를 선언하심 (9-11절)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길 시작했다. “죄인인 여자를 어떻게 할까?”를 질문하던 그들의 물음을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그들에게 질문을 돌려주셨기 때문이다.
 
  "툭!"

  돌멩이가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보게 된다. 남을 향해 들었던 돌멩이 던질 결백함이 우리에게 있는지 보게 한다.


  (마 7:3-5)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한글 개역성경은 ‘마태복음 5:28’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여자(女子)를 보고 음욕(淫慾)을 품는 자(者)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姦淫)하였느니라'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음욕(淫慾)을 품고 여자(女子)를 보는 자(者)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姦淫)하였느니라'
   그렇다. 이미 마음의 태도에서 죄인인 우리를 보게 만든다.

   (요한1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1 3:15)

  미움과 음욕, 마음의 탐심까지 죄를 정하는 율법에서 자유로울 자가 누가 있으랴.

  누군가가 슬그머니 돌아서서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그토록 등등하던 위세와 살기는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모두들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요한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나갔다고 기록한다. 왜일까? 가책을 먼저 느껴서일까? 한 명씩 한 명씩 빠져나간 자리. 이제 침묵만이 그 자리를 지킨다.
  성전의 백성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았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 드디어, 주님이 몸을 다시 일으키신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인에게 예수는 랍비나 선생이 아니었다. 그의 ‘주님’이었다.
  자신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여인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죄 사함의 선언과 함께 당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 바로 ‘복음’이다.

  결론

  후문맥에서 주님은 12절 이하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램브란트의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 그림을 보았다.

  짙은 어둠이 높은 성전천장으로부터 바닥까지 휘감고 있다. 그 가운데 자리에 밝은 빛으로 조명받는 한 여인이 있다. 바로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이다. 그 곁에 검은색 옷을 입은 바리새인 서기관같은 사람이 보인다. 그들은 율법의 정죄를 들고 여인에게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넣고자 왔다.
  하지만, 주님이 그 여인을 주목하여 보고 계신다. 그 여인의 밝은 빛은 주님의 얼굴로부터 나와 여인과 그 주변을 밝게 비추인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 그빛 아래 있는 자들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요 3:16-17)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갈2:16)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롬 5:6-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
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화 / 은빛여우


 어느 마을에 닭 도둑으로 소문난 은빛 여우가 있었다. 워낙 영리하고 날렵한 놈이라 사냥꾼들이 여러 차례 잡으려고 했지만 잡히지를 않았다. 은빛 여우는 값이 비싼 놈이었다. 황소 두 마리 값이나 했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눈을 부라리고 은빛 여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은빛 여우가 여우산 기슭에서 범수 아저씨의 눈앞에 나타났다. 범수 아저씨는 은빛 여우를 보고 너무 놀랐다. 온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집에서 몸이 아파 누워있는 아들 녀석 생각이 났다. 그래서 범수 아저씨는 팔을 뻗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순간 은빛 여우의 눈동자가 빛났다. 겁에 질린 범수 아저씨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었던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그런데 은빛여우는 도망하지를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범수 아저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한 가운데 범수 아저씨는 정신없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돌멩이를 맞으면서도 은빛여우는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정신없이 수십 개의 돌멩이를 던졌던 범수 아저씨는 정신을 차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고르며 은빛여우를 바라보았다. 은빛 여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범수 아저씨는 매우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떼면서 은빛 여우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정말로 은빛 여우는 죽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은빛여우를 본 범수 아저씨는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돌에 맞아 죽은 은빛 여우 뒤로 덫에 걸린 새끼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은빛 여우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신의 새끼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울고 있는 새끼 여우와 집에 있는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돌을 던졌던 범수 아저씨는 정신없이 돌을 던지느라 피범벅이 된 두 손으로 풀뿌리를 움켜쥐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날 이후 은빛 여우는 그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고 범수 아저씨는 여우산 기슭에 한 달에 한두 번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여우 무덤을 찾아갔다.
 
 은빛여우는 새끼 여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나심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면서 까지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디-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상과 정신이 있는자가 그리스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