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3편/ 주님을 학수고대함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이있다. 목을 빼고 발꿈치를 들어 앙모하고 바란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백난지중대인난(百難之中待人難)이라 하여 수많은 일들 중에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 들어가며 |
불쌍히 여김을 원하여 쳐다보는 눈, 지엄하신 임금님의 존전에서 불쌍히 여김을 원하는 자는 감히 얼굴을 들고 임금님을 쳐다 볼 수 없다. 땅에 엎드린 채, “마마! 불쌍히 여기소서?” 창자 속에서 터져 나오는 호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감히 지존하신 분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긍휼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있게 하신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곧 길 위에 서는 것이고 길 위에 선다는 것은 흔들리는 삶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 길 위에 서는 것이고 불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길에 나선 사람이기에 간절히 구하는 것은 이 길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주시고 외면치 않으시는 것이다. 그 눈길은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긍휼을 구하고 있는가? 어려울 때 찾는 이는 누구이며, 또 누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순종하려 하는가? (나의욕망, 리더) 우리의 삶에 계속되는 질문은 누가 내 삶의 주인이냐는 것이다.
※ 본문과 씨름하며 |
1. 우리가 눈을 들어 향하는 주는 어떤 분인가?
하늘에 계신 주시다. 그분은 우리가 피곤할 때마다 불러서 일 시키는 심부름꾼이 아니다. 살면서 해결하기 힘든 특별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부르는 전문가가 아니다. 내 편할 때 기분전환을 위해 불러 낼 수 있는 친구쯤으로 생각해서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떤가? 그분은 우리가 훑어 보거나 내려다 봐야할 분이 아니라, 눈을 들어 올려다 봐야할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의 주인이시다. 이렇게 올려다보는 자세는 주인되신 그 분 앞에 우리의 종됨을 표현하는 것이다.
2. 하늘을 향해 눈을 든 이의 간구는?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러한 간절함으로 구하는 것은
- 제가 원하는 것을 주옵소서가 아니다.
- 저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베푸소서가 아니다.
- 저희의 악행대로 벌하소서가 아니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인이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 뿐이다.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가장 긍휼한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우리의 고집을 강화시키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처럼,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하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간구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의 원하는 대로 기도를 다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분은 우리의 소원성취를 위해 만들어 놓은 우상이랑 다를 것이 무엇인가?
3. 시인이 이토록 긍휼을 갈구하는 이유는?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기 때문이며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이 말하는 조소와 멸시는 느헤미야시대 귀환한 동포들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성읍을 중건하고 하나님의 집을 세우려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 앞에서 산발랏과 도비야가 재건 공사를 한 유대인들을 몹시 멸시했을 때의 멸시라고 한다. 그때의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그 심정을 토로했다.
(느 2: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느 4: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시편기자는 종과 노예가 제도화된 문화권에 살고 있었다. 권력이 압제를 낳는 사회였다. 상전은 빈둥거리면서 아랫사람을 업신여겼다. 우리조선 시대만 생각해 보아도 양반이니 사대부니 하며 평민과 백성을 업신여기지 않았는가? 당연히 그에게는 ‘심한 멸시와 조소가 넘쳤을 것’이다. 시인에게 넘쳐나는 멸시는 고통이 되지만, 이것이 주의 긍휼을 구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내 삶의 어려움으로 참 주인을 찾자.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손을 기다리고 바라는 일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가장 힘찬 언어는 이것이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바울은 말한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8-10)
※ 나오며 |
자유에 대한 약속과 성취는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아’(갈5:13) 이내 탕진하고, 결국 더 나쁜 노예 상태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기 위한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도리어, 가나안땅으로 끌어들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을 위한 자유’가 더 중요하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하신 새로운 사명에 충실해야한다.
시123편은 압제에서 풀려나 자유를 더 나아가 새로운 예속에로의 이행을 기도한다. 그는 더 좋은 주인 밑에서 그를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들은 그리스도의 종 된 자들이다. 바울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의 종된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너희의 종된 것을 자랑한다고 했다. 우리는 죄의 종인가? 의의 종인가?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기도드리자.
오경웅 시 123수 시편사색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바라오며 연신 고개 들어 주님 우러릅니다
어린 종이 주인 어른 손만 바라보듯
여종의 눈 안주인의 손에 머물 듯
제 눈 역시 주만 바라보오니 도타운 그 은총 바라옵니다.
야훼여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멸시와 모욕 오래 겪었나이다
가진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저주 지겹도록 실컷 받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