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말씀

118th 약속/ 이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주님의 약속 2021. 3. 21. 12:50

 

 

1926101일 단성사에서 흑백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됐다. 우리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초창기 영화 대부분이 신파극, 통속 사극, 외국영화의 번안모방물 등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있던 상황에서 '아리랑'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했으며 당시로써는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다.

개봉 당일 영화가 끝나자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됐고 관객들이 일제히 주제곡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관객들은 목을 놓아 울었고 심지어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영화는 돌풍을 일으켜 이후 2년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관객을 끌어모았다. 당시 관객이 15만 명 선이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몰려들어 극장의 들보가 부러져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 광산에서도 상영됐다.

 

서울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3.1운동 당시 일제의 고문으로 정신이 나가 고향에 내려온 소작인의 아들 김영진에게 옛 친구 윤현구가 찾아오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일본 경찰의 앞잡이인 오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 하자 현구가 뛰어들어 격투를 벌인다. 이를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사막을 가고 있는 환상에 빠지고 자신도 모르게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을 받아 맑은 정신을 되찾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마을 사람들의 오열 속에 포승에 묶여 고개를 넘어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영화한편이 때론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가 어쩌면 마름과 같은 존재였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던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만 뒤에서는 다 욕한다.

 

 

메시지

 

1. 여리고로 지나시는 예수님 돌감람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1-5)

 

당시에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28km 떨어진 부유한 사람들이 살던 도시로, 예수님이 이곳을 들어가 지나게 된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전문맥 (18:35-43)에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부르는 맹인의 눈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여리고성에 들어왔을 때 한 사람과의 만남의 소개되고 있다.

 

2.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삭개오(6-8)

 

이곳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다.

삭개오란 이름의 뜻은 순결한’ ‘의로운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음에도 사람들에게 죄인취급을 당하였다.

여리고는 국경도시로 세관이 있었고, 유대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안에 있으면서 헤롯의 왕궁이 차지하고 있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중 하나였기에 세입 역시 많았을 것이다.

이 도시에 세리장은 자기 밑에 세리들을 고용한 사람으로 직위가 높았다. 삭개오는 이러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도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쨌던 부정을 저질렀던 것 같다.

 

삭개오가 돌감람나무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키는 작았고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는다. 그는 막아선 많은 사람들로 인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해 돌감람나무에 올라섰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게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세리장이요 부자 그의 나이와 지위에 개의치 않고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보고자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상상해 보라. 전봇대위에 올라가 세무서장이다.

예수님은 그곳에 이르사 삭개오를 쳐야 보셨다. 그리고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너무도 놀랐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아실뿐 아니라, 자신이 있는 나무아래 까지 오셔서 오늘 집에까지 유하시겠다는 예수님 말씀 앞에서,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 영접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며 비야냥 그린다.

상종못할 사람 삭개오, 예수님이 그 집에 가시다니...

 

3. 삭개오의 구원을 선언하는 예수님(9-10)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삭개오는 주님 앞에 고한다.

 

주여 보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율법에서는 소나 양을 훔쳐 잡거나 팔았을 경우 소는 5, 양은 4배를 갚도록 규정했다.(22:3)

하지만, 자발적으로 뉘우치고 돌려줄 경우 훔친 물건의 1/5만 더해서 배상하면되었다 (5:7)

 

이런 면에서 삭개오의 뉘우침과 배상은 파격적인 것이다.

NIV성경을 보면 8절의 내용에 Here and now라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고,주겠사오며’ '갚겠나이다는 동사는 헬라어상 둘 다 현재시제로 삭개오가 즉시하겠다는 결심을 가르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삭개오는 미친 것도 아니고 허풍을 떠는 것도 아니다. 결단, 실천, 손해봄을 각오한 변화였다. 어떻게든 끍어 모으는 삶에서 나눠주는 삶으로 바뀐 것이다.

 

예수님의 권고를 받고도 고민하며 따르지 아니한 부자 관리와는 달리 이 삭개오는 즉각적이고도 구체적인 행동을 결단했다.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라선언하신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선언하신다.

아마 이 말에 사람들은 놀랬을 것이다.

죄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죄인인 삭개오 그는 소외의 틈바구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주님은 잃은버린 자를 찾아 그 삭개오를 찾으시고 그의 집에 유하셨다. 그의 자발적이고도 구체적인 회개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4. 말씀을 적용하며

 

예수님을 만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

(4:34-35)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그들의 변화의 이유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삭개오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이런 배상을 약속하였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우리속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거룩한 회개 구체적인 회개가 있는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하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게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무화과를 찍어 내어 버리라고 하는 주인의 경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 집에 모신 것뿐 아니라 온전한 회개의 결단에 구원을 선포하시는 주님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인데, 우리는 교회안의 잃어버린 자는 아닌가? 과거의 가치기준, 과거의 기쁨이면 여전히 현재의 가치라면 예수를 제대로 못 만난 것이 아닌가? 우리속의 예수님은 너무 작은 분이 아니신가?

 

변화받지 못한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교회나오고 믿음을 갖게 됨으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교회 생활에는 익숙해졌으나,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과연 우리는 예수를 바르게 만났는가? 예수님 주위의 많은 사람들, 제자들은 변화를 경험했다.

 

요즘 진주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급작스런 확진자의 창궐로 그러하고, LH 직원들의 땅투기로 그러하다. 자신의 가진 지위와 정보력의 카르텔들을 형성하며, 다들 어려운 시기에 부동산투기를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 때문에 서민들의 분노가 폭발할 지경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 하셨는데, 돈을 사랑했던 그리고 그것으로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삭개오. 그가 예수님을 만난순간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나누어주고 흩어주고자 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주님은 그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다.

 

1902년 욕지도 손안로 A.Adamson 호주선교사가 론골에 처음 세운 현재의 동항교회. 첫 회심자요 장로인 장바울(본명 장보라).그는 장애로인해 발가락에 붓을 끼워 복음서의 그림을 그렸다. 쇄잔한 육신을 입고 남해 끝자락 욕지에서 살았으나 남긴 믿음의 흔적들은 욕지교회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다녀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살아있는 발신경에 온 에너지를 집중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림 그려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려 하였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소식을 어떻게든 전해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