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th 약속/ 열왕기하 7장 3-9절/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신호등 앞에서 멈춰선 차의 운전자의 백색실명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눈먼자들의 도시속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지 되묻게한다
팬데믹시대 우리 자화상을 보듯...
'눈먼자들의 도시'
우린 서로가 눈멀었다고 생각하고 악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는가?의사의 아내는 눈멀지 않은채 수용소에 격리된 채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아무도 보는 이 없다는 인식 속에 드러나는 것들...
우린 지금 냉혹하고, 잔인하고,
준엄한 장님들의 왕국에
들어와 있는거야.
내가 봐야만 하는 걸
당신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차라리 눈이 머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예요.
주제 사마라구 「눈먼자들의 도시」 .해냄,개정판 192쪽
[출처]눈먼자들의 도시 _ 심쉼풀이 인문학 책읽기 후기|작성자좋은이웃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죠.
우리가 울수 있다는 건 좋은거예요.
때로는 눈물이
우리를 구원해 주기도 하거든요,
울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때도 있는거죠.
_주제 사마라구「눈먼자들의 도시」 p.141
어떤 해설자는 텔레비전에 나와 적절한 비유를 들기도 했다.
그는 이 전염병인지 뭔지를 공중에 쏜 화살에 비유하면서,
그것이 최고점에 달해, 마치 정지한 듯 잠시 머물렀다가,
불가피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력은 화살의 하강 속도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신이 허락하신다면, 해설자는 이렇게 잠시 신에게 의탁한 뒤에 다시
인간의 담론이라는 하찮은 영역으로 돌아와 이른바 전염병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이 끔찍한 악몽도 마침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명은 모든 것을 삼키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갑작스런 물살이 아니라,
천천히 땅을 적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땅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수많은 개울들처럼 교활하게 침투하고 있었다.
_주제 사마라구 『눈먼자들의 도시』. 정영목 옮김. 해냄, 2019. 174-175쪽
눈먼자들의 도시
결국에는.. 사람들의 눈이 하나씩 떠져가기 시작한다.
눈(Eyes)이 보인다, 눈이 보여.
해(Sun)도 그것을 축하하려는지,
곧 도시(City) 위로 떠오를 것이다."
눈먼자들의 도시 p.461
[출처]심쉼풀이 인문학 '눈먼자들의 도시' 북리뷰 Book Review|작성자좋은이웃
오늘 우리는 극한의 상황속에서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장관의 모습과 나병환자들을 모습을 비교해 보며, 또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세밀하시고 치밀하시며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 본문과 씨름하며
1. 엘리사의 소망이 담긴 예언과 장관의 반응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절) 는 엘리사의 외침으로 시작한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이스라엘왕에게 고한다.
그 말씀의 내용인즉 “내일 이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 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에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는 것이다.
엘리사의 이 말은 도대체 어떤 말이며, 장관은 왜 이런 비웃음과 조롱이 썩힌 듯한 말을 했을까?
(전문맥) 왕하 6:24이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엘리사의 기도로 도단성을 에워쌌던 아람왕의 군대가 눈이 어두워져 사마리아로 옮겨져 그 곳에서 물과 음식을 먹고 다시 그 고국으로 돌아간 것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에워싸 버렸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포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된 성안에는 큰 굶주림이 있었다. 성경기자는 그 상황을 이런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 일(합분태)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식용이 아닌 굽이 갈라지지 않고 되새김질 않는 나귀는 부정한 동물로 율법에 취급되었다. 그런데, 그 나귀의 그것도 제일 뼈가 단단하고 살이 없는 머리를 은 80세겔 (노동자의 320일 품삯)에 거래하고 있었고, 비둘기 똥 비둘기 똥이나 음식 찌꺼기를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을 받았다. 한세겔이 4일 품삯이니 20일 품삯이 되는 돈을 주고 한스아 7.33리터의 1/6 즉 1리터 조금 더 되는 비둘기 똥이 식용으로 거래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하다가 한 여인의 외침에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우리가 오늘날 네 아들을 먹고 다음날 내 아들을 먹자하고, 자기의 아들을 삶아 먹었는데, 다음날 네 아들을 내라 하니까 저가 그 아들을 숨기고 내어 놓지 않더라는 것이다. 왕이 억장이 무너져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찢어 버렸다. 성중의 굶주림이 이 정도 상황에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사 머리가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왕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이 내 일 이맘때면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가 1스아 7.33리터에 한 세겔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 할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운 밀가루와 비둘기 똥의 질을 차치하고라도 양과 가격만으로도 30배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장관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하고 비아냥 거리고 있는 것이다. 장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엘리사는 단호하게 말한다. “네가 네 눈으로 그 광경을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우리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저런 황당한 말에 내가 속을 줄 압니까? ” “여기 나의 문제를 보십시오, 나에게는 소망이라곤 없습니다.” 하는 태도로 우리를 향해 소망을 주시는 그 분을 경멸히 여긴 적은 없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는데, 우리가 우리를 포기하여 낙심하며 희망을 접어 버리는 것은 이 장관과 같은 짓이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현실이라는 담에 집착하여 그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하나님은 미쁘시사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함즈음에 피할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하셨다.
2. 문둥이들이 목격한 아람군대 진영
한편, 장면은 엘리사와 왕과 장관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성문 어귀의 변두리지역의 문둥이 네사람에게로 넘어간다. 이들은 왜 여기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레13:45-46에 보면,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고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종교적으로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버림받고 격리된 아웃사이더 인생들이었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결론은 아람진으로 가 보자는 것이다.
왜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성에 들어가도 성중이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 것이다. 그런데, 아람군대에 항복하면 그들에게는 양식이 있으니 우리를 살려두면 우리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요 죽이면 어짜피 죽을 거 죽는 거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최악의 궁지에서 ‘살려주면 살려니와’라는 실락 같은 소망을 붙들고 행동을 개시한다.
그런데, 그들이 마음졸이면서 찾아간 아람군대의 진영은 어떤가?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거만한 얼굴로 마치 개 취급하듯 그들을 깔보며 무시할 줄 알았는데, 그 곳에 지키는 사람도 잠막 안의 사람도 한 명도 없고 장막과 말과 나귀만 남아있고, 그들의 군량미와 은금의 보물과 옷들이 그대로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성경은 그 원인을 이렇게 기록한다. 주께서 아람군대와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다. 한 명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의 귀에 지축을 울리는 천둥같이 위엄찬 말발굽소리와 전차모는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을 듣게하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감났는지 그들이 서로 말하되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기 위해 헷 사람의 왕들과 이집트 왕들을 값을 주고 불러왔다’고 판단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목숨하나 건지기 위해 줄행랑을 침으로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싸움은 참으로 놀랍다. 단지 그렇게 그들의 귀에 환청을 들리시는 것 으로도 그들을 도망치게 만드신 것이다.
위기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런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방법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예를 들어 감기가 들었는데, 크리넥스 티슈를 사서 코나 풀게 도와주는 슈퍼마켙 점원정도로 생각지 않는가? 하나님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진단해서 처방해서 감기 자체를 멈추시게 하는 의사와 같다.
사마리아성을 둘러싼 모든 아람군을 한명도 남김없이 소리하나로 떠나게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생각하는 것보다 크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문둥이들이 이 사실을 이스라엘 성에 고함
이들은 눈이 휘둥그레 졌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서 한 잠막에 들어가 그동안 배고파서 먹지 못했던 것을 실컷먹고 마시고, 금과 은과 의복을 챙겨서 어디에 감추고, 또 다른 장막에 가서도 챙겨서 몰래 짱박아 놓았다. 목숨을 구걸하러 갔던 그들이 졸지에 횡재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이 떠올린 것이 있다. 바로 성안에서 이 사실을 까마득히 알지 못한채 아람군대의 진을 두려워 하며 나귀머리를 320일 품삯에 거래하며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부정하다면 그들의 성에 들이지도 않고 성문어귀에 쫓아낸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병환자들은 자신들만 이렇게 잘먹고 이 소식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라고 서로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이 뜻밖의 놀라운 소식을 독점하게된 나병환자와 같다. 세상은 이 구원의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고,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것을 누리고 찬송하고 있다. 세상은 죽음과 그 이후의 심판에 대해 무지하고, 구원의 길로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를 알지 못한채 지금도 이땅 어느구석에선가 한 영혼이 마지막 거친 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죽음이후의 소망도 알지 못하고, 어떤이는 고행을 하며 선행을 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고생고생하고 있다. 바로 성안의 사람들의 모습처럼 비둘기 똥을 가지고 20일 품삯을 파는 비참한 지경에 이른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발견한 자들이다. 우리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가 붙어 있음으로 구원얻는 은혜의 진리를 발견한 자들이다.
동해에서 미국 LA까지 수영해서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비행기 타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 알고 침묵하고 있다면,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
어떤 목사님의 설교중에 내 마음을 찌르던 말이 기억난다.
그것은 - 우리는 히틀러와 김일성을 욕한다. 그들이 많은 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이 이 땅을 사는 동안의 몇십평생을 감옥같은 생활을 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음으로서 그들을 영원히 지옥에 던져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나병환자들은 자신들만 알고 있는 이 아름다운 소식이 아침까지 자신들에게만 있다면 벌이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사마리아 성 문지기를 찾아간다. 그들은 잠잠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그대로 고한다. “우리가 아람군대의 진에 이르러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있고 장막들은 그대로 있더이다” 그들은 뭘 덧붙이거나 빼거나 말을 아주 미사여구를 섞여서 논리적으로 멋있게 하지 않았다. 단지 본 것만 진실만 가서 고해 바쳤다. 이 성문지기는 그들의 이 허무맹랑하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미친것같은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다른 문지기들에게 이야기 하고 그것은 왕궁에 있는자에게 고해져서 결국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취되는가? 하나님은 왕이 그 손을 의지하는 장관이 아니라 성문어귀의 죽은개같은 문둥이 4인방을 통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 한가지 주의해 볼 것은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황혼에 일어났는데, 아람군대가 큰 군대의 말발굽소리를 듣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줄행랑을 친 때도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져있다.
그들이 아람진으로 항복하기 위해 움직이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람군대로 도망하게 하신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들은 국을 끊이기 위해 지피던 불이 아직 꺼지기도 전에 문둥이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피해의식을 가진 나병환자지만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사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하심으로 미천한 자로부터 왕의 귀에까지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에 어떠한 자를 사용하시는가? 이 구원의 소식을 발견하고 증거하는 일에 누구를 사용하시는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바울선생은 고전1장에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가? 왕이 병거 둘과 말 다섯 필로 아람진영을 정탐해보니 과연 그러했다.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군장비가 길에 늘려진 것을 노력하듯이 취한다.
그리하여 그날로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장관 왕이 그 손을 의지하던 장관은 어떻게 되었나? 왕이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켜 질서를 잡게 했는데 백성이 얼마나 거치게 밀치고 나왔는지 그가 성문에 밟혀서 죽게 된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눈으로는 보았지만 그것을 먹지는 못하는’ 자가 된 것이다.
▶ 정곡을 콱 찌르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장관처럼 우습게 여길 것인가? 아니면, 문둥이의 말을 듣고도 왕에게 고한 문지기처럼 진지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여전히 설교를 듣고도 나와 상관없는 의례적인 동화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사람과 정말 나에게 오늘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이 이 중에도 있을 것이다. 저는 여러분이 장관처럼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계실지 안 계실지 모르는 이름 모르는 신에게 온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시도록 사랑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살아계심을 믿고 우리가 그를 찾을 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떡을 발견하고 자신 안에 감추지 않고 소문을 전한 그들처럼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황혼에 일어나자.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할 것이다.(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