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th 약속/ 시편 116편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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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116:2)
시편 116편은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여섯 번째 시편이다. 115편에서 우상의 헛됨과 하나님의 축복을 대비할 때 사용되었던 죽음의 모티프가 116편에서는 전체 시편의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여호와께서는 언약적 성실하심을 통해 그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신다는 것이 116편이 다루려는 메시지다. 그 전반부인 1-11절을,다음은 후반부인 12-19절을 차례로 살펴본다.
여호와께 기도함(1)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여호와께 기도함⑵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을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에 대한 묘사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훌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감사의 결단
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절 여호와께 기도함
3-4절 여호와께 기도함
5-8절 여호와의 구원하심에 대한 묘사
9-11 절 감사의 결단
“내 인생이 왜 이리 고달프냐?” 라고 공동번역에서는 시작한다. 이 구절에 대한 문법적인 문제는 “내가 크게 고난을 당해도 나는 믿는다고 말한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고난을 당해도 말을 한다는 문제보다 인간이 어떤 사정 아래서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입술 밖으로 말하는 고백은 우리 마음의 내적인 감정과 연관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인생은 위기의 연속이다. 하나의 위기가 지나가면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온다. 큰 위기가 지나가면 작은 위기가 찾아온다. 작은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큰 위기기다 찾아온다. 그래서 기도자에게는 은퇴가 없다.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위기이다. 이 위기의 여행은 홀로가야 하는 여행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은 동행을 언약하신다. 우리는 지상의 기도여행을 마치고 청산의 순례자가 된다.
밤새 그가 보듬은 시 언저리에서 울고 있는 시인을 만나고, 밤낮으로 그분이 보듬은 영혼의 머리맡에서 울고 계신 주를 만난다. 들숨과 날숨마저 목구멍에 붙어버린 아슬아슬한 호흡이 정신을 차리자 투명하고 진득한 기도가 새어나온다. 주가 생기를 불어넣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시인의 기도를 들어 보라.
2.본문
① 내가 사랑하는 주_
죽음의 시간을 살아가는 시인에게 하나님이 귀 기울여주셨다. 연약할 때 돌아봐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기에, 시인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다. 이제는 평생 기도하겠노라고 진심을 덧붙인다. 상처가 회복되면 아뢰는 기도에서 듣는 기도로 그의 기도도 성숙해갈 것이다.
② 긍휼이 많으신 주_
죽음이 시인을 노려보고 사망의 고통이 엄습하자, 시인은 온 힘을 다해 내 영혼을 건져달라고 기도했다. 간절함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를 하나님이 구원해주셨다. 그를 얽어했던 죽음도 숨죽이고 떠나갔다. 말뿐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님은 은혜롭고 의로우시며 긍훌이 많으시다.
③ 주 앞에서_
덤으로 생명을 얻게 된 시인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 것을 고백한다.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상처만 남았을 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은 굳게 지켰음을 회고하면서 말이다. 거짓이 무성한 산 자의 땅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오직 의로우신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주님도 아신다. 깊은 병으로 신음할 때, 절대 고독에 휩싸였을 때 끝까지 붙들어야 할 이름은 하나님이시다. 응답이 더딜 수 있다. 침묵이 흐를 수 있다. 그래도 믿음만은 생명처럼 굳게 지켜야 한다.
시 10, 11절에서 시인은 고달픈 인생을 탓하고 세파의 거짓됨을 탄식하였으나 믿을 잃지는 않았노라고 말하고 있다. 오경웅은 이렇게 묘사한다. ‘이러한 탄식 내뱉게 됨은 창졸간이요 부지불식간이나 그럼에도 결코 절망치 않았노라.’ 연약한 인생이라 부지불식간에 짓는 허물을 피할 수 없으나 그 허물 속에 주저 앉지 않는 것은 돌이켜 그 믿음의 근원을 다시금 되새겼기 때문이다. 오경웅은 이 노래의 제목을 보주원, 주께 서원한 바를 갚고자 한다고 하였다. 돌이켜보면 받은 은혜뿐이니 나아갈 길은 오직 그 은혜 앞에서 드린 마음을 온전히 되바치는 것뿐인가 보다.
12절은 시인의 질문인데,사실상 수사적 의문문이다.‘ 내 게 주 신 은 혜 를 여 호 와 께 무 엇 으 로 보 답 할 까? ’라는 질문은 그 내용상 ‘내게 주신 은혜를 갚기원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그 구체적인 감사의 내용이 13-14절에 차례로 서술된다.
먼저 13절에서 시인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말한다. 구원의 잔이란 실제의 어떤 포도주 잔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신앙적 맥락에서 이해해보자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이 된다. 감사제라는 표현은 17절에서 나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13절에서 구원의 잔이란,여호와의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것이다.
따라서 13b절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이 다’라고 노래한다.‘여호와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는 116편에서 총 세 번 등장한다. 4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했고,여호와께서는 이에 응답하셨다. 이에 13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외치고 있다.
여호와께서 경건한 자의 죽음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다.(15절)
‘경건한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시드’이다. 이 단어는 명사 헤세드의 형용사로서 ‘인자한’이라는 뜻이 있는데,형용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사용되어 ‘인자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헤세드가 언약적 성실성을 의미하므로,하시드는 ‘언약 에 성실한 자’라는 의미가 된다. 시편에서 하시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은총을 깊이 경험하여, 자신의 삶에서도 언약적 성실성을 실천하는 신자의 삶을 표현한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성실히 유지해나갈 뿐 아니라,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및 이웃들에게도 언약적 관계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 116편의 시인이 자기 자신을 하시드로 표현하고 있음은 111-118편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경건한 자기 백성의 죽음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결박에서 풀어 자유 롭게 해주셨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선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의인의 죽음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때가 이르기 전에 주의 종을 모든 죽음의 위협에서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니 담대 하자. 나보다 하나님께서 내 안전에 관심이 더 많으시다는 것 을 늘 기억하자.
유진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의 시 116편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았다.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기도는 가장 생생한 언어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불어 놓으신 숨을 하나님을 향해 내뱉는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린는 언어의 근원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시편 116편은 모래시계의 구조를 가진 기도이다. 처음 절반 (1-11절)은 죽음, 죽음의 위협, 죽음으로 가득한 불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망에서 촉발된 기도와 감정을 가져다가 하나님의 은혜, 자비, 구원, 풍요의 경험과 섞어서 가느다란 관 사이로 내보낸다. 도움을 구하는 절박하고 쥐어짜는 기도가 하나님이 주신 도움에 대한 복합적인 증언(내가 믿음을 지켰다. 10절)으로 완화된다.
그것들이 하나씩 병목을 통과해서 내려가 감사와 자유로 모래시계의 널따란 아래쪽 칸을 채운다(12-19절). 이 기도에서 삶은 확장되고 펼쳐지며 숨통을 튼다. 죽음의 위협과 스올의 고통이 갑자기 풍요롭고 개방적이고 풍성한 삶으로 변한다.
(가느다란 병목을 지니가는) 이 전환은 한 줄 띄우기로 나타난다. “내가 경악하며 사람은 다 헛되다고 말했다(11절).”에서 “주께서 내게 주신 이 모든 풍성함을 어떻게 표현할까?(12절)로 넘어가는 경로는 무엇일까? 힘겨운 삶의 1-11잘에서 찬송과 서약을 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일관 된 삶의 12-19절로 어떻게 넘어갈까?
그 과정을 알았을 이 시편 기자는 왜 그 빈 공간을(모래시계 사이의 공간을) 채우지 않았을까? 그 전환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우리가 궁금해하지 않게 무슨 비법과 공식을 왜 주지 않는 것일까?
도와달라는 외침에서 감사하며 축하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이 전환을 아무런 표시나 설명없이 빈 공간으로 두는 것은 시편의 흔한 특징이다. 그 여백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뭇잎을 흔들고, 구름을 흘려 보내고, 돛을 부풀리는 보이지 않는 바람이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혼돈과 공허”(창1:1)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따라서 이 여백 앞에서 우리는 멈추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숙고하는 게 마땅하다. 기도는 우리가 질서를 잡는 게 아니라, 질서가 잡혀지는 것이다.
3. 결론
시편 116편,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기쁨을 그토록 흥겨운 삶을 과시하며 끝나는 이 ‘산 자들의 땅’ 기도에는 아주 신기하게 여기는 문법적 요소가 있다. 지금 우리는 이 산 자들의 땅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익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문법적 요소는 그냥 지나치기가 아깝다.
바로 이 문장이다. “산 자들의 땅에서 내가 주님 앞에서 걷는다(9절)” 성경에서 ‘걷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든 그리스어로든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을 사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 최단 거리로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걷는 대신에, 여유롭게 돌아다니면성 걷을 것을 –경치도 보고, 아름다움도 감상하고, 자기 영혼과 대화하고, 친구와도 대화하는 것을-제안한다. 이것은 기도 산책이다.
우리는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문화에 살고 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우리의 모래시계 같은 인생에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은 이 삶을 교회가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