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1편/ 그의 기적을 기억하게 하셨으니
“우리 하나님께 무한한 신뢰를 드리라.”
_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시111:2)
1/ 찬양의 선언(1절)
[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 찬양의 동기(2-9절)
[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3]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4]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7]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8]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9]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3/ 찬양의 조건(10절)
[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이 111편과 그 다음에 나온 112편 113편은 모두 “할렐루야”란 말로써 시작한다. 111편은 하나님을 중심 테마로 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라”(할렐루야)는 것을 명령하고, 112평은 이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할렐루야를 명령하며, 113편은 이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중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111편과 112편은 그 문학형식에 있어서 꼭같이 히브리 알파벳 글자 순서로 시를 한 줄씩 지은 시인데 22개의 자모를 한 절에 둘씩 사용하여(마지막 절만 셋씩 사용) 두 시가 다 10절씩이다. 이런 형식의 시의 내용 이해에 더 큰 의미를 준다기보다 이 시를 가정에서나 회당에서 암송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 이 시들을 속으로 따로 외울 만큼 성도들의 숨결 또는 맥박과 일치하게 해 주고 있다.
당신은 여호와의 행사를 목격한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찬양의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를 목격한 일이 없이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사는 그 행사가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다 별 볼일이 없는 그렇고 그런 일들뿐이다. 허사일 따름이다. 여호와의 행사는 찬양되어야 마땅하다. 한 순간 한 시대뿐 아니라 영원토록 찬양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마치 우리가 삼행시 오행시 놀이를 하듯 히브리어 알파벳 글자를 순서대로 인용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그의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적 찬양이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행사를 이제도 찬양하자.
여호와는 어떤 분인가에 대해 이 시 전편에 차고 넘친다.
[2]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3]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누구를 위해 행하신 일인가?
[6] 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일이다. 존귀하고 엄위함은 시편 96편 16절의 반복이다.
그러한 찬송을 받으실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5절에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신실한 이들 살뜰히 돌보시니 일찍이 하신 말씀 기억하심이라)
[7]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행하시는 바는 진리와 선이요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시니)
양식에 대한 것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도 뜻하지만, 여기서는 옛날 이스라에ᅟᅵᆯ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와 바이에서 샘물을 솟아나게 하셔서 주리고 목마른 그들을 먹고 마시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른 시인은 이것을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시 34:10)고 했다. 또한 여기 사용한 ‘양식’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말한다. (잠 31:15)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의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한 것은 이 시인의 찬양에서 이미 말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서 먹이신 그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4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그러나 육체적 양식의 공급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인은 다음 구절에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고 하며, 그 계약하신 바를 인간은 변경하고 거스리는 일을 한 대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지켜 주시는 진실을 갖고 계심을 찬양하고 있다.
오경웅은 5절과 7절에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위가 하나 지행합일(知行合一)하신 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경건한 자를 돌보시는 것은 당신이 일찍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행하심에 진리와 선함이 있으며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행합일의 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며 이것이 지혜의 근원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편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즉 행하고서야 비로소 앎이 있다고 말한다. 행함이 따르지 않고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와 행 사이에 즉(卽: 곧, 가깝다, 나아가다) 말고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이 끼어드는 순간 지(知)와 행(行)은 분리되고 만다. 어찌 그것이 가능할까? 다른 길이 없다. 인생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이 그 길이다. 어리석은 인생의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행할 방도를 구하는 것은 모순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어찌 흙인 인생이 진리를 품을 것인가? 진리가 인생을 품고 사로잡을 뿐이다. 말씀에 사로잡혀야 말씀을 따를 수 있고 그로써 절로 행할 수 있다. 그러니 은혜로 행하는 것이다. 누가 감히 하나님 말씀을 스스로 행할 수 잇다 하겠는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행사는 주변 도처에 보인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섭리는 ‘인간들의 사건이라는 장갑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이지 낳는 손’이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