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th 약속/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_ 이사야 55장
“거친 들에 씨뿌린 자는
들을 잊기 어렵나니“
_ 황동규의 비가(悲歌)제4가 중에서
시편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 126:5-6)의 말씀과 겹쳐 공명을 일으킨다.
누가 거친 들에 씨를 부리겠는가. 땀이라면 모를까 누가 눈물을 흘리며, 울며 씨를 뿌리겠는가. 기름기를 찾아볼 수 없는 땅, 흙보다 더 흔한 돌멩이와 바위, 키를 넘는 무성한 잡초, 얽히고 설킨 풀과 나무의 뿌리, 거기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것이 많다.
왜 굳이 거친들에 씨를 뿌려야 하는가, 이왕이면 기름진 밭을 찾아야지. 어렵게 선택을 했다 해도 끝이 아니다.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땀과 눈물을 빠뜨릴 수 없다. 돌 하나 들어낼 때마다 허리가 휘청거린다. 어느새 손을 굴참나무 껍질을 닮는다. 거름은 천생 흘린 땀이며, 한 줌 결실을 손에 쥐며 흘리는 눈물은 누구도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이와 닮아있다. 척박한 땅이며 그 땅에서 목마르며 지친다.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1-5)
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돈 없는 자들도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다.
포도주와 젖은 즐거움과 풍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잔치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탄식소리를 듣게된다.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신 8: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믿고 있는가? 입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할지라도 실상 양식 아닌 것을 위해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은 아닌가?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2.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에게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 그분이 가까이 계신 때는 다른 때가 아니라. 기도하러 나아온 오늘 예배하는 이 시간인줄 믿는다.
찾고 부르짖자. 주님 약속처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하지만, 먼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행하는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욕심과 아집을 버리지 못한 채 기도하는 것은 마치 칼을 달라고 떼쓰는 3살짜리어린아이와 같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불의한 생각까지도 다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분은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신다.
3. 여호와의 기념(8-13)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하신 성품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마실 것을 주시고, 모든 민족에게 값없이 언약을 허락하시며, 악인들을 값없이 용서하신다(1-7절). 도대체 누가 이런 은혜의 복음을 만들 수 있겠는가? 너무 좋은 소식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만 이 은혜의 복음을 알 수 있다. 그 논리를 생각해보자.
첫째, 우리는 여호와의 생각을 알 수 없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분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 우리의 좁은 사고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각에 다다를 수 없다(8-9절).
둘째, 여호와의 높은 생각은 마치 하늘에서 비와 눈이 내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내려와야만 했다(10절).
셋째, 우리가 여호와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계시의 모델이다. 우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로 마음의 생각을 교환한다. 우리도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내려왔다.
넷째, 여호와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그 말씀은 늘 그 뜻하는 바를 이룬다(10-11절). 한 축복을 생생한 히브리 시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그들은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하고(12절), 새로운 약속의 땅을 물려받는다(13절).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보다 높으신 주님의 길과 그 생각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과연 우물안 개구리처럼 우리의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할찐대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측량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고난의 시기에 우리는 왜 나에게 고난이 고통이 필요하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 고난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지 돌아가지 않고 주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고 보낸 일에 형통함을 이룬다.
여기에 이런 비유가 사용되었다.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고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의 말도 그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이것이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요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리라.
이사야가 일찍이 예언한 황폐한 것들과는 대조되는 것들이다.
사 32:13-14 ‘형극과 찔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대저 궁전이 폐한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산과 망대가 영영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의 즐겨하는 곳과 양떼의 풀먹이는 곳이 될 것임이어니와’
징계로 황폐해진 땅이 돌이키며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회복의 땅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처한 현실의 고통이 있는가? 그것은 그 아픔으로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생명의 메시지이다. 또한 이 땅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 세상의 물질이 전부가 아니며 사람들이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말씀만을 신실히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자.
3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그렇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말씀으로 살 수 있다.
땅보다 높은 하늘처럼 우리보다 높으신 주님, 그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을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고전 2:8-10)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대림절이다.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절기다. (딤후 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