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말씀 묵상

시편 9편, 10편

주님의 약속 2019. 1. 3. 13:43




    

시편 9~10편에 나타나 있는 두드러진 주제들 중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자주 나타나는 주제는 무신론이다.

특히, 10편에 기록되어있는 사악한 자들의 다음과 같은 말들 속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없다’(4)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11)

여호와께서 감찰치 아니 하신다’(4,13)


시편 9 1~12절,  시 10 편 1~4절

김광영 목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멜로디

 

표제어 제목을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있다.

뭇랍벤은, ‘한 아들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잘 알려진 멜로디의 이름이었다. 슬픈 단조의 음으로 슬픔을 잘 표현한 음조에 본 시가 붙혀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답관체 형식

 

본 시편의 시들이 답관체 형식에 입각한 구조를 지고 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의 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른 숫자송이 있다. 일종의 답관체 형식이다.

1초라도 안보이면/2렇게 초조한데

3초는 어떻게 기다려~~이야이야이야이야/4랑해 널 사랑해/5늘은 말할꺼야

십억 지구에서 널 만난건/7럭키야

사랑해 요기조기 한눈팔지 말고 나를 봐

좋아해  나를 위해  웃는 미소 매일매일 보여줘

8딱 팔딱 뛰는 가슴 /9해죠~ 내 마음

10년이 가도 너를 사랑해/~ 언제나 이 맘 변치 않을게

오늘 본문은 이런 구성을 지닌다.

사각형입니다.

알렙(א):1~2

베트(ב):3~4

기믈(ג):5~6

달렏(ד)은 생략:7~8

와우(ו):9~10

자인(ז):11~12

헤트(ח):13~14

테트(ט):15~16

요드(י):17

카프(כ):18~20

 

9편은 개인적인 찬송시로 보이고, 10편은 개인적인 애가로 보인다. 이 시편이 원래부터 단일한 작품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

그것이 답관체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몇몇 히브리 사본과 역편에서(헬라어 구약성경, 벌게이트역)에서는 두 시편을 단일작품으로 다룬다. 10편은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드문 일로 시10편이 9편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시편의 독특한 용어과 표현이 공유되고 있다.

무신론자들로 인한 시편 기자의 기도

 

여기서 나타난 무신론은 단순히 이론적 무신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신론으로써 유신론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더욱 위험하고도 사악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전혀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살고 행동한다.

 

지중해 동부의 고대 세계(헬라 시대 이전의 세계)에 있어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론적 무신론을 고수하는 것은 유신론을 고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신론자들의 믿음이(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는 각기 그들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일종의 믿음이나 신념이 필요한 것이다.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많은 현대인들은 사실상 불가지론자들일 뿐이다. 불가지론은 그들이 받아들이기에 훨씬 더 쉬운 견해와 입장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무신론은 초기 불교이다. 이런 종교는 무신론적 요소를 지나고 있으나 나름의 심오하고 숭고한 도덕율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론적 무신론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시편기자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은 인간들 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재라기 보다 도덕성과 정의에 대한 개념들 교훈들의 부재상황에 있다.

이들은 시편기자가 묘사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나는 ... 요동치 아니하며’, 6)

권력이나 행복 같은 것들만을 추구한다(‘대대로 환난을 당치아니하리라’, 6)

자신의 안전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나 행복 같은 것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무시하고 정의를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의 판단도 하나님의 심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연약한 자들을 착취하거나 압제하며,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강한 자들에게 아부한다.

 

로마서 128_30절에도 이런 사람을 언급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하느니라

 

10편에 나타난 무신론의 특징은 단순히 사악한 자들과 압박자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만 표현되어 있지 않고, 의로운 수난자들이 당하는 유혹의 본질적 성격 가운데도 나타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무신론자들이 낙을 누리고, 도덕률은 소용도 없고, 정의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도덕률 정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유혹이 된다.

이 악한 세상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도덕적 삶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압박당하는 자들은 차라리 압제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동조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는가?”

 

아합과 이세벨 vs 나봇

열왕기상 211~16

아합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업을 자손 대대로 이어가게 하시는 분이시다(25:23)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한 사람도 하나님의 유업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업 무르기 제도를 두셨던 것이다.

왕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백성들이 바르게 이행하도록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왕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것을 깨뜨리려고 한다.

이세벨은 아합의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했던 방식대로 힘과 음모로 그 땅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장애물이 있다면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이세벨의 편지를 받은 성의 장로들과 귀인들은 이세벨의 악한 음모를 따라 나봇을 죽인다. 누구 하나 악한 음모에 반대하지 않는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나봇은 죽임을 당한다.

 

11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13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시편기자는 종말론적 해결책, 죽음이후 세계에서 도덕이 그 효력을 발휘하고 정의가 행해지라는 것을 믿음으로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지혜로우면서도 장점을 지닌다. 많은 신자들이 종말론적 개념에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또 많은 이들이 전혀 위안을 얻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인식 사이의 커다란 간격을 인지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순히 죽음 이후의 세계나 최후의 심판을 내세울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 즉 바로 현세적인 구원이 필요했다.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그는 하나님이 결코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바로 그 곁에 계시다는 사실과 의로운 자들이 이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내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증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시편에서 그러하듯 이 시편 기자가 실제적으로 그의 역경 가운데서 구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가 역경에서 구출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과, 그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용감하게 살아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악인들의 득세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전에서 기도할 것이다. 73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끌어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라.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참고문험                                                

매일성경 역사서 열왕기상

WBC ‘시편 상(上)’ pp.152~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