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말씀

93th 약속_ 시편 90편_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주님의 약속 2020. 8. 9. 12:50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5)

 

 

 

 

 

 

, 하나님이여, 내 눈동자에 영원을 새겨주소서!”

_Jonathan Edwards

 

 

1/ 하나님의 영원(1-6)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2/ 하나님의 진노(7-11)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3/ 하나님의 자비(12-17)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마음문을 열며

 

유럽의 한 유명한 성당은 현관을 거쳐 성당 안으로 이어주는 세 개의 반원형 통로로 유명하다. 오른쪽 입구 위로는 대적으로 된 반원형 통로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있다. “모든 쾌락은 잠시뿐이다”. 예배자들을 성당안으로 이끌어주는 왼쪽 입구 위에는 또 새겨졌다. “모든 고통은 잠시 뿐이다”. 중앙복도로 이어지는 주 통로 위에는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영원하다는 글귀가 선명히 새겨져 있따.

중앙 통로 위에 새겨진 이 메시지는 시편 90편의 핵심주제다.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금방 사라져버릴 일시적인 것, 잠시 동안 고통을 줄 수도 있고, 기쁨을 줄 수도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영원한 것을 시야에서 놓치기가 너무나 싶다. 이 시편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일개우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 시간을 초월해 우뚝 솟아 있는 탁월한 시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로 시편에서 가장 오래된 시며, 4권의 첫시다. 본 시편에서는인간의 수명이 길어야 칠십이요 팔십이라고 말하며(10) 인간의 한정된 삶을 회한한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부터 노아에게 이르는 족보에서는 보통 900세이상 살았다. 그러나 홍수 후 수명의 현저가 감소가 예상되었고(6:3), 11장의 노아의 아들 셈부터는 500세에서 200세로 줄었다. 아브라함의 수명은 175, 요셉은 110세에 죽어 사람의 수명이 100세 전후에 머무르게 된다.

 

본문과 씨름하며

 

1/ 하나님의 영원(1-6)_ 영원하신 하나님과 무상한 인생

 

이 시편은 하나님의 영원에 대한 장대한 진술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대대로 그분 백성의 거처’(1)가 되었다는 것이다. ‘거처로 번역되는 단어는 신명기 3327절에도 나온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요동하는 인생에서 우리의 안전은 산이 세워지고 땅이 창조되기 전에 계신 분,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께 있다.

창조를 비유하는 말들(생기다. 조성하다)는 출산 용어에서 나왔다(2). 아버지가 아들 앞서 존재하듯, 하나님도 태고의 산들보다 앞서 존재하셨다. 그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다는 것은 임시 방편 은신처로 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거처에 머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노래한다. 그의 인생을 통해 느낀 것을 이 시편을 통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자신을 제대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모른 채 인생의 연약함만 보는 사람은 비참함에 빠질 뿐이며 혹은 인생의 즐거움에 취하는 사람은 교만함에 빠질 뿐이다.

시인은 하나님은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조성하시기 전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 앞에 인생은 티끌과 같은데, 그 분의 목전에서 인생의 천년은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인 것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신다고 한다. 홍수 위의 띠끌은 어느 정도의 크기인가? 인생의 시간은 잠간 자는 것과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과 같다는 것이다. 풀을 보라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는가 싶더니만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말라 비틀어지는 것이다.

충격적이지만 인간은 먼지로 지어진 존재이다. 시인은 창세기 319절을 암시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인간에게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분으로 그리고 있다(3). ‘흙으로, 재로, 먼지로 돌아가라는 것은 죽음의 현실이다. 우리는 필멸의 존재이며 동시에 허무하리만치 짧은 삶을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천 년이 단 하루와 같고(벧후 3:80, 밤의 몇 초와 같다(4).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아침에 돋는 풀”(5). 아침에 활짝 피지만 저녁에는 햇빛과 바람에 말라 시드는 풀과 같다. 인생은 땅에 엎질러진 물, 해가 나오면 사라지는 그림자,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 혹은 안개와 같다.

우리는 마치 세상의 주인이나 되는 것 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의 눈에 인생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해 보자. 인생의 생명은 그 호흡에 있나니 호흡이 끊어지면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2/ 하나님의 진노(7-11)_ 주의 분노 앞에 죄인으로 서 있는 인생

 

인생의 크기는 이렇게 작을 뿐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의 앞에 놓고 보시며 우리의 은밀하게 행한 죄라도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시고 있다. 우리의 모든 날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악으로 그 분의 진노를 사고 있다. 주의 눈동자가 우리를 향해 비추실 때 주의 심장과 폐부까지도 감찰하시며 우리 영혼뿌리 깊은 곳의 죄악 된 생각까지도 보고 계시니 주의 얼굴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

이렇듯, 이번 문단에서는 하나님의 영원에서 진노로 생각이 옮겨간다. 시인은 민족이 헤쳐 나가야 하는 곤경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돌릴 뿐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죄악과 은밀한 죄’(8)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 간다”(9)고 말한다. 시인은 비통함이 아닌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현실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그나마 우리의 짧은 인생은, 자비가 없다면 자비를 입을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흘러가고 있다(11).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깝죽대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랑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눈앞에서 누가 감히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 바로 우리 죄의 대가이다. 그리고, 신속히 가는데 마치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처럼 그 칠팔십의 인생도 지나버린다고 한다.

지금 20대라고 영원히 젊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언하건데 지금부터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살아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은 시간이라는 기차를 타고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쉼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표현을 날아간다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인생의 삶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수고와 슬픔의 이야기들이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생이 당하는 고난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그 사람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불쌍히 여길지 모르지만, 언젠가 우리의 장례식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 눈물을 흘리는 날이 분명히 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남의 이야기하듯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우리는 어쩌면 매일 죽음을 연습하고 있다. 아침에 생동감있게 하루를 시작하지만, 어두운 밤에 홀로 이불을 덥고 누울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인생을 주께서 보고 계시고 우리의 죄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야할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수사 시절, 이 시편을 읽다가 옆으로 밀어 놓아야만 했다. 그 당시에는 모세가 겁먹은 영혼에게 무서운 진리를 전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마틴루터, ‘루터 전집’). 그러나 회심한 이후 이 시편은 그에게 협박이 아니라 위로가 되었다. 루터는 이렇게 쓸 수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긍휼의 진노이다.”

 

3/ 하나님의 자비(12-17)_ 주의 인자와 은총을 구함

 

시인의 기도가 3가지로 나온다.

첫 번째 기도는 인간의 죄와 유한성에 관한 것이다(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인은 이렇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분노하사 그 얼굴을 돌리심으로 수고와 슬픔 가운데 있게 된 인생에 주께서 돌아오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주의 긍휼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두 번째 기도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면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13-14) 살아갈 것이다. 주께서 돌아오사 주의 인자로 만족케 하시며 우리의 짧은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시기를 구한다.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실 것을 구하고 있다. 주의 행사와 주의 영광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나타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시면 우리 평생에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어느 때까지니이까(13)” 은근하게 타로르던 묵상의 도화선이 기도의 화약을 만나 폭발력 있는 질문으로 터져나왔다. “어느때까지니이까?” 기도가 무르익어 가면서 시인은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힘찬 열정이 솟아난다.

 

세 번째 기도는 우리의 일에 관한 것이다. 죽음이 가져오는 비극의 하나는 우리의 노동을 중단시키고 성취를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행한 일에 관해서만 그렇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자기 종들에게 보여 주실 때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신다.”(16-17)

 

우리는 어디에서 낙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 없이 구하는 기쁨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밝은 검은색 혹시 이런 말이 있는가? 뜨거운 겨울 혹시 이런 말이 있는가? 하나님 없는 기쁨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졌고, 그분의 불어넣으신 생기로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까지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는데,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것은 마치 고기가 물을 떠나서 잘 살아보겠다. 기차가 선로를 벗어나서 힘차게 달려보겠다는 것이나 같은 말이다.

 

시인의 간구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이다. 우리주님은 가지나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죽는 것처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분께서 내 삶에 돌아오시면 그 분의 인자로 우리의 영혼이 만족케 되며 칠팔십의 밤의 한 경점같은 띠끌같은 인생이라도 평생을 즐겁고 기쁘게 살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우리가운데 기쁨이 가득찰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떠난 시간들의 곤고함과 화를 당한 시간들 이었음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돌이키고 그 분이 우리삶에 돌아오실 때 그 모든 슬픔의 날을 기쁨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고 있는가? 주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더하시면 우리 손의 행사가 견고해진다. 그 분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 영원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일을 붙드시며 우리의 삶에 기쁨을 더하시는 것이다.

 

 

 

 

정곡을 콱 찌르며

 

인생을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생의 끝이라는 관점에서 하루하루를 바라보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을 마지막 날을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가시고기의 저자는 오늘이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라고 말했다...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인생의 날을 계수하며 사는 기도를 가르친다. 우리의 남은 날들은 은총의 날들이다. 이 은총의 날들을 어떻게 창조주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아니 인생이 갈망하는 팔십을 넘어선 장수를 한다해도 은총이 없는 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목표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낙심과 절망 가운데 살아갈 수도 있다. 온갖 시간에 쫓기면 긴급함의 폭정에 짓이겨지고 있지만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 수 있다. 이 시편은 당신의 삶에서 영원에 대한 시각에 다시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일을 인간의 갈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라고 요청한다. 세상의 부가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시편을 노래하던 모세는 나이 일백이십 세에 그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으나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골짜기에서 장사되게 되었다. (34:5-7)

이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 몸에 소망무엔가 우리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은 그 평생에 만족함과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부활의 소망이 있다. 그 소망과 기쁨을 노래하며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하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짧은 세월과 미약한 힘, 불확실한 생각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가려고 한 것을 용서해 주소서. 이것들은 기껏해야 초라한 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제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만드시도록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면밀히 보시는 당신의 눈 앞에 저를 기꺼이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진노는 사랑의 또 다른 면이며, 제가 겪는 고통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임을 알고 있습니다.

! 주님, 제가 인생의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몇 년 더 사는 것에서 소망과 복을 찾지 말게 하시고, 제가 소유한 인생을 당신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소망과 복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참고도서 -----------------------------------------------------------------------------------------------

 

이동원, 묵상의 샘, 압바맘마, 2014

스티븐 J. 로슨, Main Idea로 푸는 시편 76-150 (vol. 2), 김진선 옮김, 디모데, 2008

유진피터슨, 시편으로 드리는 매일기도, 이철민 옮김, 홍성사, 2002

존 스토트, 내가 사랑한 시편, 김성웅 옮김, 포이에마, 2012

묵상과 설교20177-8, 성서유니온, 시편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