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53-72절 _공회앞에 서신 예수님
예수님을 붙잡은 무리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끌고가서, 자신들이 파송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인계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거듭 예고하신 대로 마침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진다.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 총독 관할 하의 공회는 사형을 선고할 권한이 없었다. 게다가 미쉬나에 따르면 사형재판은 밤에 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공회는 아침에 공식 공회를 열어 예수님께 사형을 정죄하기 위한, 죄목을 찾아내려는 심문 절차를 밟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 (53-59절) 공회앞에 서심
밤에 공회는 열리고,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다.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고 거짓증언이 많고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 예로 제시된 것이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한 말인데,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증언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그 어느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전을 헐겠다고 하신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요한복음 2:29에 근접한 말씀을 기술할 뿐이다.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삼 일 만에 세울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시대가 오면 기존의 성전이 무너지고 완전한 새 성전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였다(겔 40-48장). 게다가 어떤 이들은 이 일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기대하기 하였다(삼하 7:13, 슥 6:12). 그렇다면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예고들과 선언들은 구약에서 예언 되어 온 그리스도 시대가 예수님의 선교와 더불어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연관성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대제사자으이 질문(61절)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2/ (60-65) 대제사장의 심문
다양한 거짓 증거와 증인들이 제시되는데도, 주님은 줄곧 침묵을 지키신다. 마가는 예수님의 이러한 침묵 사실을 이중적으로 기술함으로써 그 사실을 매우 강조한다. 그 ㅁ낳은 거짓말을 쏟아내는 거짓 증인들과 대조적으로 당신을 위한 진실한 변호조차도 하지 않는 예수님. 예수님의 이 침묵은 당시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이 이 심문의 궁극적 목적이 아님을 직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침묵은 당신이 가셔야 할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으시려는 예수님의 또다른 적극적 순종의 일면이다. 한편 이사의 53:7(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을 성취하는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침묵을 자신의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삼는다. 아마도 그는 침묵을 지금까지 증언들에 대한 무언의 동의로 받아들이고, 그 증언에 근거한 결정적 질문을 던진다.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하며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하고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하라 하고 하인들조차 손바닥으로 쳤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눈앞에 계신데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 말로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하나, 내심 주님을 반기지 않는 그들, 세상의 기득권을 너무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파는 자를 마중하시고((14:42) 성경을 이루려고 자신을 넘겨주신(14:49) 예수님은, 이번에도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자중지란에 빠진 종교지도자들을 대신하여 더 증인이 필요없을 만큼 분명한 자백을 하심으로 제 발로 십자가까지 올라가신다. 새로운 성전이 되실 예수님은 친히 그 성전의 제물이 되어 새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대제사장의 손에 자신을 맡기신 것이다.
3/ (66-72절) 베드로의 세 번 부인
베드로는 ‘죽을 대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지만 고작 “멀찍이”따라고 있을 뿐이었다. 이 간격은 공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두 사람 간의 신뢰의 거리요, 믿음의 거리요,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거리이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가? 헌신하지 않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거리만큼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자기 정체를 시인하여 십자가에 나아가는 동안,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앞에서 자기 정체를 부인하고 있었다. 예수께 한 맹세는 소홀히 여기면서 또다시 저주받을 각오로 부인하고 있었다. 그를 깨우는 닭울음소리와 부활 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주시겠다는 용서와 회복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는 스스로 저주를 담당하고 죽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부인(否認)을 자신의 시인(是認)으로 덮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자.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대제사장과 가야바와 베드로의 이름이 잇달아 언급되고 있다. 둘은 예수님께 큰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다. 전에 베드로 예수님께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고, 가야바도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복음이나, 그 말을 가야바가 할 때와 베드로가 할 때 서로 얼마나 다른가? 주님은 왜 침묵하셨나?
“주님, 놀라운 장면입니다. 당신을 육체적 정서적으로 밟아 뭉개려 했던 고문과 조롱은 다만 당신의 힘을 증명해 주엇을 뿐입니다. 이 모든 고통 중에서도 당신의 사랑은 지고한 위엄과 아름다움을 띠고 나타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 참고도서
매일성경 2020년 3,4월호 마가복음, 성서유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