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_시편62편_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_김광영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5)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이 시편의 두드러진 특징은 6번 등장하는 히브리어 ‘아크’(그럼에도 불구하고오직)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2,3,5,6,7,10절에 각각 등장한다. 이 단어는 순수한 믿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인간 본성의 모순적인 특징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거짓된 존재이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 시편이 표현하고 있는 종교적 진리의 심오함은 하나님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 모든 사물과 인간과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뿌리를 보는 것임을 시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합 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히브리시인은 9절에서 말한다.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사람은 입김처럼,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다. 인생이 이런 입김, 혹은 포말과 그림자를 좇아가다 자신의 삶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초라해짐을 보여준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고 삶을 다시 들여다보기를 권면한다. 왜인가? 끝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대로 갚으심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숨결 같으나 하나님은 그 생을 낱낱이 보시고 기억하시며 보응하신다. 입김같은 인생과 하나님의 눈동자같은 지키심이다. 7절에서 시인은 노래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그렇다. 반석이신 하나님으로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야말로 능히 기댈만 하며 그런 분이심에도 인생을 눈여겨보시고 귀기울이시며 한 호리의 어긋남도 없이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은혜라!
시편 기자는 이 가운데서, 침묵의 힘을 노래한다. 오늘의 시대는 말의 힘을 예찬하는 시대이다. 언론의 자유는 발전된 시민사회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말의 성찬 속에서 오히려 혼란과 고통을 경험한다. 도무지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분별하기도 용이하지 않을뿐더러 정의를 주장하는 논리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오만한 광기를 느낄 뿐이다.
오늘의 시편기자는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이에나 떼처럼 덤벼드는 공격의 현장에서 그는 이웃들의 거짓과 저주를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첨예한 불안의 현장에서 그는 침묵이라는 하나님의 방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잠잠히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침묵의 성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다.
그에게 하나님은 구원이시고 요새이심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발견에 도달한다. 하나님이 능력의 주이시며, 사랑의 주이심을 알게된다. 그것은 신학의 교실이 아닌 삶의 교실에서 체험한 현장학습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긴 침묵이후에 비로소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고 힘이 있다. 침묵을 배우지 못한 사람의 말은 그냥 말 장난일 뿐이다. 우리의 말이 세상이나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 아직도 침묵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앞에서 침묵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마가복음 1장 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이 시의 표제어에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다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져 있다. 시편 39편엗 “여두둔으로 한”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나고, 시 77편에서는 “여두둔의 법칙을 따라”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여두둔은 아삽이나 헤만과 더불어 역대상 16:41에 열거되어 있는 다윗의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이다.
이 이름은 여러 시편의 제목에 나타나는 아삽이나 헤만이라는 이름처럼 한 개인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어두둔이 책임자로서 이끌던 노래하는 사람들이…”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두둔은 언약궤가 오벳에돔에서 시온산으로 옮겨졌을 때 유대 성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악장들 중의 한 사람으로 처음 선택되었다. 그의 아들들도 역시 성막에서 성악 및 기악 예배의 다른 부분을 인도하도록 임명되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고용된 6명의 아들이 있었다. 여두둔과 그의 가족은 경건심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며 예언의 영도 받았던 것 같다.
1문단(1-3절) : 신뢰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시인은 파멸로부터 안전하다고 굳게 확신한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파멸로부터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은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조용함 혹은 평온함이라는 내용들 또한 이전에 쉼 없는 영적혼돈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2문단(4-5절) : 대적자들에 대한 고발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대적자들은 시인을 박해하는 사악한 친구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음해적일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즐겨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공격하는 사람의 높은 지위나 권윙 대해 어떤 존경심도 갖지 않는다. 그들은 파괴가 목적인 행동만을 할 뿐이다. 그들의 공격은 마치 기습적으로 포위공격을 하는 군대의 행동이나, 혹은 도시의 약해진 와곽벽을 무너뜨리려는 공격과 비슷하다. 시인은(3인칭을 사용해서) 어느 순간에나 쓰러질 수 있는 흔들리는 담과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
입으로는 시인을 축복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저주를 퍼붓고 있는 대적자들의 이중적인 행동들은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키고 있다. 본문은 시인을 대적하여 내뱉어지는 저주와 욕설이 주술적으로 혹은 준(準)주술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가려 주고 있는 듯하다. “언제까지?”라는 질문이 적들 혹은 박해자들을 향한 고발과 도전과 논쟁에 사용되고 있다.
3문단(6-8절) : 확신과 권고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인은 관심을 백성들에게로 돌린다. 그 백성들은 8절을 통해서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들의 마음을 기도 중에 하나님께 ‘토하라’는 권면을 듣고 있다. ‘토한다’, 혹은 ‘쏟아놓는다’는 표현은 삼상 1:15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에 나온다. 옇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토한 것(쏟아놓은 것)뿐이니...
또 유사한 것으로는 히스기야가 여호와 앞에서 앗시리아 편지를 “펼쳐놓고(쏟아놓고)” 있다.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4문단(9-13절) : 사람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부요함을 의지하는 것, 더군다나 종종 그 부요함 속에는 포학과 탈취의 결과물들도 포함되는 부요함을 의지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모습으로 경고된다. 부요함이 열매 맺고 증가될 때 사람의 마음을 두어야 하는 곳은 거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질은 하루살이처럼 짧기 때문이다.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도 가벼울 만큼!
하나님의 권능은 그의 인자하심과 연결되고, 그의 권능은 각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심과 연결되기에 하나님의 강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 20:5-6)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