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th 약속 시므온의 찬송_ 대림절 4번째_김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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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 2:30, 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25-35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개역개정판>
(눅 2:25-35)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NIV>
(눅 2:25-35) 『[25] Now there was a man in Jerusalem called Simeon, who was righteous and devout. He was waiting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and the Holy Spirit was upon him. [26]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die before he had seen the Lord's Christ. [27] Moved by the Spirit, he went into the temple courts. When the parents brought in the child Jesus to do for him what the custom of the Law required, [28] Simeon took him in his arms and praised God, saying: [29] "Sovereign Lord, as you have promised, you now dismiss your servant in peace. [30]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31]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sight of all people, [32] 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for glory to your people Israel." [33]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marveled at what was said about him. [34] Then Simeon blessed them and said to Mary, his mother: "This child is destined to cause the falling and rising of many in Israel, and to be a sign that will be spoken against, [35] so that the thoughts of many hearts will be revealed. And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too."』
17세기 바로크 시대 유럽의 가장 탁월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 빛과 어둠을 탁월하게 만졌던 빛의 대가, 명암법의 렘브란트, 바로 자화상과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그린작품이 복음서의 '돌아온 탕자' '전 세계 그림 가운데서 도달할 수 없는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은 걸작으로 1667년경, 렘브란트가 죽기 2년 전에 그린 미완성 작품. 그리고 이 년 후 암스테르담의 어느 빈민가에서 그리다가 생을여인 마지막 작품이 바로 미완성 유작 "시므온의 노래 Simeon Nunc Dimittis"이 희대의 화가 렘브란트는 무슨 심정에서 이년 전 돌아온 탕자에 이어'시므온의 노래'를 창작하게 되었을까?
육신의 황혼녘 렘브란트는 그가 겪은 고통을 끝내고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 그의 마지막 염원과 소원을 죽은 나사로의 부활과 시므온의 찬양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시므온은 아기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주께서 제게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세상을 위하여 보내 주신 구주를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분은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시며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십니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한 후에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 이 아기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배척은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그러나 이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또한 그들의 마음 속 가장 깊은 생각들을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했던 시므온처럼 렘브란트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평안히 눈감기를 간절히 바라며 삶과 그림의 마지막 장면을 성서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이 아닌 나이들어 처연한 시므온의 기원과 찬양에서 찾은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머리도 빠지고 주름은 늘어 고뇌와 우수에 잠긴 백발의 노인의 형상이지만 차마 가슴에 안기에도 숨이 멎을 정도의 벅찬 감동으로 구세주를 손바닥이 아닌 엄지와 검지로 바쳐 든 시므온의 모습에서 그는 행복과 기쁨, 안도와 커다란 희망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 역시 자신의 어둠 속에서 시므온의 간절함의 빛을 드러내 구원의 세상을 바라봅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목회자요 저술가인 존 스토트(John R. W. Stoot), 그는 교회력에 따른 매일 성경묵상집 ‘나의 사랑하는 책’에서 시므온을 이렇게 소개한다.
오늘은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한 경건을 노인을 소개하려 한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그에게, 하나님은 그가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갔다가, 바로 그때 난지 8일 된 아들을 데려온 요셉과 마리아를 만났다. 상황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시므온은 영적 분별력으로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았다. 그는 아기를 안고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는 본능적으로 아기를 받아 안았다기보다는 아기 예수를 알아보았다는 상징적인 몸짓이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 주십니다”(눅 2:29, 새번역)
첫째, 시므온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았다. 그가 실제로 본 것은 마리아의 아이였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노라고 고백했다. 우리를 죄의 형벌과 감옥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를 보았다고 말이다.
둘째, 시므온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보았다. 그 빛은 열방을 비추고, 이스라엘에 영광을 가져올 것이다. 여기서 시므온은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이사야 49:6을 언급하는데, 이 구절은 나중에 바울의 선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셋째, 시므온은 예수님을 분열의 원인으로 보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춧돌인 그런 존재 말이다. 예수님 때문에 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시므온의 이야기를 통해 영적 분별력에 대해 배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분별력을 주셔서 겉모습 이면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를 보게 하시기를!
하나님의 구원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사 9:1-7)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2. 세상의 빛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요 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분열의 원인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성전미문에 올라가다가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언 (행3:6)하는데 걷기도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한다. 이에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 달려 나아가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을 하였다고 증거할 때에 남자만 오천명이 이 말씀을 듣고 믿었다.
그러자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 대제사장 안나스가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심문한다.
이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이다” 라고 강력히 증거한다. (행4:11)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아 죽음에서 살아났다.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해야할 자칭 건축자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예수는 ‘보배로운 산 돌’로 비유된다. ‘산 돌’의 개념은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구약성경에 정통한 유대인은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온 신상을 무너뜨리신 산 돌의 예언을, 모세과 이끄는 광야의 조상들을 먹인 물이 돌을 쳤을 때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절망적 상황을 풀어줄 메시야로서 '산 돌‘을 그들은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예수가 그 ‘산 돌’ 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린양 같은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너희도 ‘산 돌’이라는 것이다. 마치 자석에 붙어 있는 못이 자석처럼 자성을 발하듯이 ‘산 돌’이신 예수의 피에 적셔진 너희는 ‘산 돌’같이 된 것이다.
우리는 ‘산 돌’로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바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직접 들려주신 말처럼 ‘네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했듯이 이 복음을 들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전 곧 교회가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이 무엇을 했는가?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대신 양이나 소의 제물의 죽음을 통해 고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가 모두가 바로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전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구약의 제사제도를 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분 앞에 누구든지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에서 처럼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가 마리아에게 마리아가 예수님께 죄를 고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예수의 피에 의지해서 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분은 바로 ‘거룩한 제사장’이다. 하지만, 이것도 알기만 하고 써먹지 못하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인가? 1억이 있어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돈이지만, 어디 장독에 숨겨두었다가 죽어버리면 휴지 조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용서받는 이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의 말인가? 아니다. 구약성경에도 기록된 말씀이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예수는 믿는 자에게는 ‘보배’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건축자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 그들에게는 거절당하신 것이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 요즘처럼 아스팔트가 나 있지 않은 당시에 길가에 불필요한 돌들이 있어서 사람들이나 수레가 지날 때에 얼마나 귀찮고 껄끄럽게 느껴졌겠는가? 예수가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희는 예수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왜? 그들이 말씀을 순종치 않기 때문이다. 믿지않는 자는 바로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이다.
우리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 예수는 보배가 되든지 거치는 반석이 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 당신 때문에 내 행동에 너무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좀 잠시 어디 가 계실 수 없습니까? 죄를 지으려고 하는데 당신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군요” 라고 우리가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빛으로 오듯이 예수님을 보배롭게 여기게 되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자 하면 어둠에 행하는 자가 빛으로 오지 않고 두려워 하듯 예수님을 귀찮고 껄꺼럽게 여기는 것이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1:12)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면서도 삶으로는 그 분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않는 불신자는 아닌가? 믿지않는 것의 척도는 순종함으로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그 분의 말씀을 보배롭게 여기고자 하는가? 걸 거치는 돌로 여기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