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th 약속 _추수감사절_ 신명기 26장 1-11절_ 주께서 내게 주신 것
우리에게 고마운 일을 해준 사람들을 잊고 살 때가 많지 않는가? 또 우리가 그토록 수고하고 애써서 도와주었는데 감사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며 서운해 할 때도 있지 않았는가? 우리 속담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받은 은혜에 대해 무디고 쉽게 잊어버리는 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이 그럴진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얼마나 감사를 표하고 있는가? 우리 예수님도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후 사마리아인 한명이 와서 감사하는 것을 보며 물으셨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추수감사절, 살아온 날들을 감사로 돌아보며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도록 하자. 지난 날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 ‘에벤에셀’,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산에 준비되리라. 예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를 고백하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에 대한 찬송을 하게 된다.
Sun, 17th Nov 19
Thanks Giving Day
▶ 말씀 속에서
1. 맏물을 하나님께 드림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들어가 거기 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에서 토지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고 고백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들어가 얻은 첫 수확물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고 하신다.
김기석 목사의 ' 가치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에 추수감사에 대한 이런 글귀들이 있다.
종교라는 단어 ‘religion’의 기원인 ‘religare’는 ‘우리를 근원과 다시 연결시킨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 인근 유대인들은 1년에 ‘3차례’ 예루살렘 순례를 떠난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다. 이 절기들은 농사력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켰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사건이다. 우리의 3~4월에 해당되는데, 이때는 보리추수시기와 맞물린다. ‘칠칠절’은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념하는 것인데 무화과와 포도수확기와 맞물린다. ‘초막절’은 광야를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터진 물을 마시며 살아온 시기를 기억하는 것인데, 여름무화과와 대추야자수확기와 맞물린다.
이렇게 각각의 절기마다 자연의 리듬을 배음으로 깔고, 역사적 신앙적 경험을 주선율로 연주했던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절기를 맞아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어떠했을까? 어딘가 속해 있다는 안도감이다. 사람의 기본욕구중에 ‘소속에의 욕구’가 있다. 식물로 비유하면 뿌리는 내리고자 하는 열망이다. 소속감은 ‘내가 혼자가 아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지금 내 옆에 걷고 있는 이들은 모두 나의 설 땅이 되어 주는 것이다.
장바니에는 말한다.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좀더 현실적으로 대다수가-자기 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라고 보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사람들은 순례를 통해 출애굽 사건을 소환한다. 자신들의 부르짖음 압제의 고통을 들으신 하나님을 기억한다. 시내산 언약을 떠올린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소명을 확인한다. 조상들이 감내했던 광야의 고달픔과 그 속에서 맛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떠올리고 감사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우선 순위, 제일 첫 것을 드리고 있는가? 우리로 약속의 땅 언약의 땅에 들어오게 하신 이가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모습으로 우리를 죄악의 건지사 천국백성 되게 하신 주님께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누군가는 하루의 가장 첫 시간 새벽을 기도의 시간, 말씀묵상의 시간으로 떼어 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일주일의 가장 첫날 ‘일요일’의 ‘주의 날’ 곧 주일로 따로 떼어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 삶에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우선 순위임을 고백하는 몸의 예배이다.
우리의 물질 씀씀이는 어떠한가? ‘사람의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다. 우리 삶에 헌금은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 돈을 쓰다보니 남으면 드리고, 안 남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되는가? 살아가기가 팍팍한 순간이 많지만, 부모님에 대한 용돈을 먼저 챙기는 것이 바르지 않는가? 하나님께도 우선 순위로 십일조 감사헌금을 드리고 나머지 것으로 우리 삶을 살아가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잡혀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의 작은 것을 드리지만, 그 마음을 보는 부모는 뭐라도 더 큰 것으로 아이의 마음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싶어한다.
부자가 드린 많은 돈 보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을 크게 보신 주님이다. 그가 그 빈핍한 중에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을 주님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셨을 진데 그분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토지소산의 맏물 최고의 것으로 그분께 감사를 표할 줄 아는 백성이 되길 바라셨다.
2. 과거회상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이 이토록 하나님께 맏물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5-9절을 보면, 이 이유가 잘 나와 있다. 과거를 회상할 때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가 너무도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리하는 아람사람이 애굽땅에 우거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고, 소수의 사람이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게 하셨다. 애굽사람의 학대와 괴롭게 함과 중역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 음성을 들으시고,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사 강한 손, 편팔, 큰 위엄, 이적, 기사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셨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자. 압제와 신고의 시간 그 가운데 건져내신 주님의 강한 팔이 있지 않은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히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 이시간 기도할 수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 사단의 종 되고 세상풍속을 쫓고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권속이 되고 영생을 상속받는 자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은행에 10억을 빚졌다고 하고, 일주일에 50만원씩 그 빚을 갚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자. 그런데 정해진 날 은행에서 50만원을 갚으려 하니, 은행원이 계좌를 확인하고 “저희 기록에 의하면, 선생님은 빚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선생님 계좌에 20억을 입금했기 때문에 빚은 다 갚아진 것입니다”
그렇다. 주께서 우리의 죄의 값을 넉넉히 치루시고, 우리를 죄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겨 내사 주님의 당당한 자녀로 부르신 것이다.
3. 여호와께 경배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그리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이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욥의 고백처럼 적신으로 와서 적신으로 가야할 인생에 하나님이 덧입혀 주신 복이며 선물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임을 그분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자가 진정한 예배자이다.
우리는 기도나 예배를 마치 하나님께 또 다른 무엇인가를 떼써서 얻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경배의 자리이다. 우리가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할 때, 하나님은 필요를 따라 더 넉넉히 부으시고 채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풍족하다면 그것을 이웃들과 나누며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레위인은 당시에 예배를 주관하는 자들이고 따로이 땅과 기업이 없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그네 객들은 또한 그 땅에서 아무런 기업이나 상속받은 것이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향한 감사의 나눔으로 그들에게 또한 물질이 흘러가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었다.
▶ 삶으로
러시아의 민담하나가 있다. 한 가난한 농부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한다. 쟁길질 끝나고 시장기가 돌 무렵 나무 밑에 빵 한조각 먹었다. 그런데 어느날 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맹물로 허기를 달랜다.
“오늘 하루 굻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누구든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군.”
그 빵을 훔친 것은 악마였다. 농부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자 빵을 가져갔다. 하지만 농부는 빵도둑에게 악담하기는커녕 축복했다.
그 악마는 대장 악마에게 야단을 맞는다. 악마다운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악마는 다른 술책을 쓴다. 이제 농부의 빵을 늘려주기로 한 것이다. 변장한 악마의 도움으로 농부는 가뭄이나 홍수속에서도 많은 수확을 했다. 곡식이 남아돌자 그것으로 술을 만들라 부추긴다. 허기를 달래주던 일용할 양식이 쾌락의 도구라 바뀌었다. 술이 생기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고 놀기만한다. 이제 인간의 모습은 없고 동물들로 변하고 말았다.
김현승님의 시 <감사하는 마음> 구절이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주인(主人)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