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th 약속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_ 시편 130편 _ 주약교회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 들어가며
우리에게 참으로 시간이 가지 않을 때가 언제인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릴 때 그 기다림의 시간은 일반적인 시간보다 시계추의 무게는 더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편 130편은 참회의 기도 양식으로 된 개인 애가이다. 시인은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을 통하여 높은 영적인 경지에 도달한다. 시인은 ‘깊은 곳’이란 표현으로 자신의 고통의 정도를 묘사한다. 이 ‘깊은 곳’에 대해 맥캔(Mac Cann)은 어둠의 세력이 파괴와 황폐화와 죽음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시인은 멀리 계실 뿐만 아니라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이 시편에서 두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된다. ‘여호와여’, ‘주여’라며 하나님을 네 번이나 부르고 있다. 이 시편은 시편 기자의 고통을 호소하며 시작하지만, 곧바로 단호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기다림’이라는 단어 역시 4번이나 나온다. ‘기다림’은 이 시편의 중심개념이다. 좌절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연결고리이다.
사무엘 베게트(Samuel Beckett)는 ‘고도(Godot)를 기다리며’에서 결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부조리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뿐인 어느 시골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인물과의 약속을 위해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장소와 시간이 맞는지, 그리고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막연히 기다린다. 거의 50년 가까이를 기다리고 이 일은 이제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만다.
베게트가 2차대전 중 피신 생활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기다림으로 작품화했다. 작품에서는 ‘고도’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 단지 해가 질 무렵 고도의 전령인 한 소년이 등장하여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전갈만 보낸다.
블라디미르(Vladimir)는 계속 ‘모자’를 들추는 행동을 반복한다. 인간의 지성을 상징한다. 고도가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에스트라공(Estragon)은 계속 ‘신발’을 벗기기 위해 끙끙거리고, 그 신발을 안을 살핀다. 인간의 육체적인 면을 상징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일을 힘들어하며 블리다미르에게 계속해서 떠나자고 한다.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므르에게 자리를 떠나고 종용하나, 그들이 자리를 뜬 사이에 고도가 올까 나무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도 오지도, 가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정말 끔찍해’ 아무런 진전없는 기다림에 대한 에스트라공의 탄식이다.
오늘 시편은 어떤가? 기다림 속에 기도하는 시인, 그리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찬송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신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시간, 매순간 실현되는 있는 소망의 실재를 붙잡고 기다린다. 이 시편은 기자는 목 놓아 하나님을 부르는 우리에게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도 더 열심히 하나님을 기다리라 말한다. 최신식 치료법을 무장한 현대의 심리학자보다 고대의 시편기자가 우리에게 훨씬 더 의미 있는 도전을 준다.
◈ 중심에서
1. 주께 부르짖음 (1-2절)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부르짖는가?
-> 그는 깊은 곳에서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길 간청한다.
-> 깊은 곳은 절망의 장소, 탄식의 장소, 분노의 장소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곳을 간구의 장소로 바꾸고 있다.
-> 깊은 곳,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릴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부르짖는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길 부르짖는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 깊은 데는 혼돈으로 가득 찬 깊은 바다를 가리키며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의 장소 ‘스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죄를 사해주시는 주님 (3-4절)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인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나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신진데 그 앞에 누가 설수 있는가?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으로 그 앞에 나간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시인은 자신의 죄 때문에 ‘깊은 곳’에서 신음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시인이 말하는 깊음은 인간이 당면한 고통의 심연이다. 그것은 곧 죄로 말미암는 고통이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시1:5)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두 가지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첫째는,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당신의 마음에 품고 계시다면 누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용서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용서는 하나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님을 경외하는 것 밖에 없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다.
공의로우사 죄를 감찰하시나 긍휼이 많으신 주님이시기에 감히 그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음이다.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아시면서도 돌이키기만 하며 우리 간구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이다. 이 사죄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죄의 삶을 끊을 수도 없다.
시인은 하나님과 단절된 듯 한 절망의 심연(깊은 데)에서 부르짖는다. 언약의 대상이지만 죄로 인해 당당할 수 없게 된 자의 호소이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달라’는 요구는, 여전히 하나님이 자기의 외침을 들을 만한 거리에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넋두리나 탄식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3. 주를 기다림 (5-6절)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그가 기다림 속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 내 영혼이 여호와를 바라며, 내가 그 말씀을 바란다고 한다.
시인의 간구는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은 인자하사 풍성한 구원을 행하시기에 하나님의 그러한 성품 앞에서 모든 죄악을 자백하며 그분을 기다릴 수 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주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
(이사야 40:30-31)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시인이 하나님을 기다림을 무엇에 비유하는가?
->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는 구문도 반복된다. 고대에는 파수꾼이 밤을 지켰다. 그들은 남들이 다 잘 때 밤새도록 경계를 선다.
이 시편기자는 파수꾼이 맡고 있는 업무의 위험성보다는 ‘아침에 대한 기다림’에 더 주목한다. 그것은 파수꾼이 긴장을 풀고 안도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소망이다.
사방으로 둘러싼 적들로 인해 두려워 떠는 파수꾼에게 아침은 곧 희망이고 생명이듯이,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만이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환하게 해줄 수 있다.
담임목사 김광영
주약교회 주일설교
항상 잠이 부족하던 훈련병시절, 새벽 불침번을 서면서 다음 교대자가 와 주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가? 사방에 보이지 않는 적들로 둘러싸인 파수꾼에게 아침의 햇살은 얼마나 소중한 기다림인가?
어떤 죄라도 하나님의 풍성한 구속과 인자하심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지금 시인은 현재의 실제적인 고난에서 해결되는 것을 사죄의 징표로 요구하고 있다. 모든 고난이 다 죄의 결과는 아니더라도, 혹시 현재 당하는 어려움이 내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자.
4.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주님 (7-8절)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이 시편의 깊은 곳(1-2절)은 높은 곳(3-4절)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평범한 개인의 일상(5-6절)을 공동체의 삶(7-8절)로 데려간다.
시편기자는 기다렸다. 그것은 아무런 약속이 없는 고도를 기다림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며 주님 앞에 가만히 서 있기기 얼마나 힘든가? 우리는 개어있는 동안 늘 재잘거림으로 자신을 채우려한다. 내면에서조차 침묵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깥 세상이라고 더 나을 것이 없다. 라디오 텔레비전, 음악 소리 하나 없는 방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을 앙망하며 시인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기다림을 기도로 표현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하나님께 드린 시간은 그분의 때를 실현시키는 데 사용되리라는 마음속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롬 8:24-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나오며
하나님과 단절된 절망의 심연에서 넋두리나 원망의 탄식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시인.
사방으로 적들이 둘러싸 두려워 떠는 파수꾼에게 아침이 곧 생명이듯,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만이 구원임을 갈구하는 시인.
주님. 우리의 삶에도 이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있게 하옵소서.
죄악을 용서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죄를 용서하심만이 아니고 용서받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케 하려 하심이다. 경외심은 가장 깊은 신앙의 표현이다. 아무리 깊은 인간고의 깊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깊은 신앙을 체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바다 깊이에서 풍랑과 더불어 싸우는 위험한 순간을 가졌다고 해도 사나운 파도보다 하나님을 더 무서워할 줄 아는 신앙의 깊이를 가질 때 그는 구원 받을 수 있다.
시편기자가 드린 시편 130편은 구약의 기도이면서도 가장 신약적인 기도라고 일컬어진다. 마틴 루터는 이 시편을 가장 바울적인 기도라고 말했다. 가장 심오한 인간 실존의 해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데서’라는 표현은 ‘바닥에서’라는 말고 통한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고난의 심연에서 고난의 원인을 발견한다.
고난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종교나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고난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 실존의 딜레마이다. 그러나 대부분 종교나 철학이 이 문제를 아무리 난해한 언어의기교로 다루어도 고난을 직면하는 인생에게 별 희망이 되지 못한다. ‘고난의 현상’에만 집중 할 뿐 ‘고난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편기자의 기도가 진실로 깊은 데서 부르짖는 기도일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죄를 대면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경함하는 고난의 자리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의 죄를 직면하여 주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심판자의 용서만이 인생의 새벽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기도 속에서 만난 주님의 큰 사랑 안에서 시인은 바닥을 치고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