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5:1~20 거라사의 광인
본문 (막5:1-20) 관찰 | 질문 | 해석 | 적용 | |||||||||||||||||
1.문체: 설화체 2.전문맥 - 하나님 나라의 비유, 풍랑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심.
3.문단나누기
귀신들린자의 입장에서... 1문단 ( 1- 5) 예수를 만나러 나옴 2문단 ( 6-10) 이 지방에서 내보지 말기를 간청 3문단 (11-13)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간청 4문단 (14-20) 예수와 함께 있기를 간청
4.문학적강조점 (대조를 중심으로) 배에서 나옴 <-> 무덤사이에서 나옴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내 이름은 군대니 들어 보내지 말기를 <-> 보내어 들어가게 5.신문기자되기
후문맥 -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심 열두해 혈루증든 여인을 고치심
| 배경이해 낱말풀이 | ◉ 군대 - 귀신은 자기들이 숫자가 많기에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함. 당시 팔레스틴에 알려진 군대(레기온)은 약6.000명으로 이루어진 로마 군대의 연대를 나타내는 단어임. ◉ 데가볼리 - 데카(10)과 폴리스(도시)의 합성어로 이 곳에 10개의 헬라 동맹도시가 있었기에 붙혀진 이름이었다. 데가볼리에 사는 이방인 중에는 시장에 고기를 팔기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들이 있음. | ||||||||||||||||||
1, 배에서 나오시는 예수를 처음 맞이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가 왜 나왔으며, 어떤 모습이었는가? | -더러운 귀신 들린자.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자기를 괴롭게 마시기를 간청’하기 위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던 사람. | 귀신들린자의 모습 -> 사단은 그 사람 속에서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철저히 파괴했다. 하지만, 주께서는 사단을 몰아내시고 그를 회복시키시길 원하신다. 내 속에는 사단의 지배를 받는 성품은 없는가? 주께서 십자가에서 야수처럼 벌거 벗기우고 채찍질 당하시고 강도틈에 죽으신 예수님은 처절히 고통당하심으로 나를 사단의 사슬에서 해방사신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거라사인들의 모습 -> 그들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믿음을 질식시킨 자들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 앞에서 내가 변화되는 것에 대해, 주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자인가?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는 자인가? -> 내가 주와 거하기 위해 결단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새벽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개의치 않고 구원의 큰 일을 알리는 전도자. 나에게도 이런 구원의 감격과 복음전파의 열정을 주옵소서 | ||||||||||||||||||
2. 그의 요구는 무엇이며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기를 간청(10절) -돼지에게 보내어 들어가게 하기를 간구(12절) - 주님의 허락이 있자. 더러운 군대 귀신이 나와 2.000마리 돼지떼에 들어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몰사 | |||||||||||||||||||
3. 이 광경을 지켜본 거라사지방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 -귀신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함 - 예수께서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함 -> 한사람의 온전함 보다 돼지 이천마리의 경제적 손실을 더 크게 여기고 예수께서 능력 나타내심에 위기감을 느낌 | |||||||||||||||||||
4. 정신이 온전해진 사람이 예수께 간구하는 것과 예수님의 대답은? | - 배에 오르실때에 함께 있기를 간구함 -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함. 그결과 ->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한 큰 일 데가볼리에 전파, 모든 사람이 기이히여김 | |||||||||||||||||||
정 리 | 나는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사단의 지배인가, 성령의 지배인가? 주님과 함께 있음을 불편히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내 속에 허락하신 주님의 구원의 감격을 다시금 회복하여 내가 받은 은혜를 증거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
주약교회 마가복음강해 김광영 목사
쫓아내는 사람 vs 좇아 가는 사람
마가복음 5장 1절 - 20 절
돼지사육은 유대인 지역에서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쪽발이 갈라졌으나 되새김질 하지 않는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 돼지를 먹지도 않았고, 따라서 식용으로 기를 리도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 돼지가 사육된 곳은 이방인 지역이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나오시자 제일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이 누구인가?
그 마을에서 귀신 들려서 난동을 부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고 추방시켜 버린 그래서 돌무덤에 혼자 살면서 자신을 자해하던 사람이다.
그의 눈은 광기로 흐려있고,
머리털은 뻣뻣하게 굳은채 풀어 헤쳐져 있다.
그의 온몸은 자해한 핏자국들이 엉겨붙어 있고,
그의 옷에서는 구더기가 나며 냄새가 진동한다.
밤낮 무덤 사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던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호통치신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원컨대 하나님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그 속의 귀신들은 나오기는커녕 도전하고 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군대니이다.’
귀신 무리 떼거리가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린자의 간구는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 떠나길 싫어 했는가?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귀신의 거하기에 너무나 적합하기 때문이다.
거라사인 돼지 집단사육지의 ‘돼지떼’에 들어가기를 주님이 허용하셨다.
그리하여 2000마리의 되지가 무려 10리 거리를 달려서 갈릴리 바다에 가 몰사 당했다.
왜 주님은 돼지떼 들어가기를 허용하셨나?
돼지 치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손해 보상없이 남의 사유재산을 일방적으로 침해당한 격이 아닌가?
이때, 돼지 치던 자들이 마을에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예수께 간청하는데 ‘예수께서 그 지방을 떠나달라’는 것이다.
사태를 파악해 보니 귀신들린자는 온전하여져서 옷을 입고 바로 앉았는데 그것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무관심했다.
그들이 안타까와 했던 것은 돼지 시체 2000마리가 바다에 익사해서 시체가 동동..
만일 예수님을 누구네 집에 모셨다가 이제 누구네 집 재산이 거들날런지..
소 100, 양 3000, 염소 1000..
거라사인의 마음은 한영혼에 대한 구원보다도
2000마리의 경제적 손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돈에 눈 멀어 인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그 동네 그들의 마음이
귀신에 씌워진 마음이다.
반면, 예수님은 돼지 2000마리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한 사람을 고치고자 하셨다.
귀신이 이 마을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보다 돈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돼지 2000마리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상식(?)이 되어 버렸다.
돈에 중독된 사회 돈에 중독된 마음이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돈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마음이며, 우리의 생존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애착이다.
하지만, 이 돈이 우리를 포로로 잡으려 하고 우리의 마음을 강팍케 만들려 할때.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잘먹고 잘살기 위해, 남보다 더, 아니 남들 만큼은 살기 위해, 난 신앙생활을 잠시 뒷전에 물려야 되겠다는 이 세상의 논리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부를 쌓고, 자신의 안전을 돈이 책임져 줄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주위의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는 마음에 일격을 가해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식을 쌓을 곳이 없어 창고를 헐어야할 고민에 잠못드는 자라도 하나님이 그 여러해 취할 양식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에라도 그 영혼을 찾으실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돈보다 인간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
이 사회를 향한 탄식과 분노와 눈물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쫓아 버리던지, 예수를 좇아 가든지.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을 쫓아 내고, 광인은 예수를 좇아 가고 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며 설교에 귀 기울이며 뭔가 주님의 음성을 느끼고 마음이 부드러워 지고 녹아 지는 것을 느끼지만, 다음주일날 아침에는 하나님의 집으로 곧장 달려갈 것을 열심히 고대하고 기다리는대신, 의도적으로 집에 머물러 남아 있거나 다른 곳으로 가게된다. 왜? 진정한 회개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거라사인은 예수님앞에 섰을때, 그들의 마음속까지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듯 환하고 읽고 계신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속 계시면 그 죄상이 드러나고 폭로될 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한 아담처럼 무화과에 숨듯 숨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음받은 광인은 그토록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열망하고 있는가?
그는 미쳐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를 싫어했고, 예수님을 쫓아 내버리려 했다.
7절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소서’
하지만, 그랬던 그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와 함께 있겠다고 떼쓰고 있다.
그는 고침받았다. 아무도 그를 가장 아끼는 사람까지도 속수무책 해줄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해주신 것이다. 그행복, 그 기쁨에 겨워 “내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다. 바울도 이전에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모욕했지만, 예수님을 뵙고 그분이 누구신지 깨닫고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였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어떻게 대하고자 하는가?